[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종묘의 터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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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종묘의 터와 건축
문화유산의 보존과 개발 논쟁은 다른 나라서도 흔한 해묵은 이슈 도시가 진화하는 한 갈등은 지속 역사성과 재개발 균형추 맞춰야
요즘 종묘가 시끄럽다. 종묘 앞 세운상가 재개발을 두고 국가유산청과 서울시가 연일 날 선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종묘는 본래 조용한 곳이었다.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경건하고 엄숙한 사당이라 건축물도 참 단순하게 지었다. 별 꾸밈이 없다. 기능에 충실히 따르고자 했을 따름이다. 태조 때 세워진 정전은 7칸, 세종 때 세워진 영녕전은 8칸으로 시작했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정전과 영녕전에 모실 신주의 수가 늘어나자 차츰 칸수를 늘려 정전은 19칸, 영녕전은 16칸에 이르게 되었다. 외국의 한 유명 건축가가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을 보고 길게 뻗은 단순함에 감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종묘의 건축이 ‘미니멀리즘의 정수’라거나 ‘동양의 판테온’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과연 옛사람들에게 그러한 개념이 있었을까. 여러 궁궐 건축의 상량문에서 ‘검소하고 질박하게 지었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를 통해 건축에 대한 옛사람의 미학을 어림할 수 있다. 어쩌면 지나친 호들갑이 종묘 건축의 본질을 해치는 것 같기도 하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금 우리는 종묘에 대한 옛 기록과 남아 있는 건축물을 통해 당시의 사정을 조금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태조실록’ 태조 3년 9월 9일 자 두 번째 기사에 경복궁과 종묘의 터를 정한 기록이 보인다. “… 임좌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그 동쪽 몇 리 떨어진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에 종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치었다. ” 여기서 감(坎)은 팔괘의 하나로 북(北)을 가리키니 ‘감방’은 북쪽을 일컫는다. ‘임좌병향’은 임(壬)을 등지고 병(丙)을 향한 방향이다. 그런데 ‘임’과 ‘병’은 24방위의 이름으로 ‘임’은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북북서, ‘병’은 남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남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경복궁과 종묘의 터는 동쪽으로 약간 틀어진 남향이고 지금 지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종묘는 처음부터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는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궁궐의 왼편에 종묘를 두고 바른편에는 사직을 배치하는 당시 도성 계획의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토지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은 궁궐에서 볼 때 오른쪽인 인왕산 밑에 세웠다. 곧잘 나라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종묘와 사직’은 왕조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장치였다. 선대 왕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는 왕권의 혈통적 정당성을 보여주는 곳이었고, 나라의 생산 기반인 토지와 곡식을 상징하는 사직은 백성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선언이었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은 땅의 방향과는 달리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 볕이 잘 드는 남쪽이나 종묘의 터가 향하는 남남동쪽이 아니라 남서쪽을 바라보도록 정전과 영녕전을 지었을까. 경복궁과 창덕궁은 주요 전각이 모두 남향이고 창경궁은 동향이다. 궁궐이 남향하는 것은 “덕(德)이 있는 군자는 남쪽을 향해 앉는다”라는 맹자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궁궐은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창경궁이 동향인 것이 이상한데 옛사람들도 그 이유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창경궁을 재건할 때 맹자의 말씀에 따라 창경궁을 남향으로 고쳐 짓자는 상소가 있었다. 그러나, 처음 창경궁을 지을 때 “후인들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제대로 볼 줄 아는 술자(術者: 관상감에서 풍수와 지리 등을 보는 관리)가 그렇게 한 것이므로 옛 제도를 가벼이 여길 수 없다”라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옛사람들도 뚜렷한 명분이 없으면 원래의 모습을 함부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은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지금의 원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흥미롭다.

유교 경전에 충실했던 궁궐 건축과는 달리 종묘의 건축은 풍수에 따른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죽은 사람을 모시는 묏자리를 잡을 때는 유난히 풍수를 따지는 것이 우리 풍습이니 죽은 사람의 신주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서도 당연히 풍수를 중시했을 법하다. 풍수에 의하면, 집의 뒤에 있는 산을 ‘주산(主山)’이라 하고 앞에 있는 산을 ‘안산(案山)’이라 하는데,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의 안산은 남산, 즉 목멱산이 된다. 여기서 안(案)은 책상을 뜻하기에 안산은 ‘책상 산’이라고 하여 책상처럼 나지막하고 평평해야 한다. 좌식 생활을 했던 예전 책상은 나지막하고 평평했다. 형태상으로는 옥궤(玉机, 옥으로 만든 책상)나 횡금(橫琴, 눕혀져 있는 거문고), 또는 아미(蛾眉, 미인의 눈썹처럼 가늘고 부드럽게 휘어진 지형) 등이면 좋다고 했다. 집 앞에 있는 안산이 높아서 앞을 가로막는다는 느낌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수의 원칙에 따라 정전과 영녕전이 남쪽이나 남남동쪽이 아니라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정전과 영녕전 월대에서 남산을 바라볼 때 국립극장이 있는 남동쪽부터 높다가 서울타워가 위치한 남남서쪽이 최정상이고 백범광장이 있는 남서쪽이 상대적으로 낮고 평평하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과 개발을 두고 국가유산청과 서울시가 벌이는 논쟁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한 해묵은 이슈다. 사실 이 논쟁은 도시에 깊이를 더하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보존과 현재의 경제 활동과 생활에 필요한 개발을 어떻게 균형 있게 맞추어 나가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도시의 경제 활동과 시민의 생활을 무시한 보존이 있을 수 없고 문화유산이 우리에게 주는 시간의 깊이와 그 의미를 등한시한 개발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도시가 진화를 거듭하는 한 보존과 개발의 ‘균형추’를 찾아야 하는 난제는 앞으로도 우리 앞에 계속 주어질 것이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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