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세계속으로] 세 황제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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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세계속으로] 세 황제의 시대
220년 만에 다시 떠오른 강권 지도자들 약소국은 ‘위성과 자율성’ 갈림길에 서
1805년 12월 2일은 ‘세 황제의 전투’가 벌어진 날이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의 군대가 중부 유럽의 아우스터리츠에서 충돌하였고 나폴레옹이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장기 전쟁에서는 패했고 나폴레옹은 대서양 작은 섬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다.

정확하게 220년 뒤, 세계는 엉뚱하게도 새로운 황제의 시대를 맞으면서 과거로 퇴보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0년 집권하여 21세기의 대표적 독재자로 부상했다. 두 번째는 2012년 등장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진핑이다. 중국 공산당은 10년 단위로 장쩌민·리펑, 후진타오·리커창 등의 집단지배체제를 실현했으나, 시진핑은 권력을 독점하는 종신 지배의 길로 들어서면서 21세기 중국의 실질적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아니라도 황제처럼 행동하는 세 번째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다. 그는 제도와 여론에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느낌과 주관적 판단을 앞세워 자의적으로 정책을 이끌고 있다. 특히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지난 100년 가까이 쌓아온 전통과 제도를 단숨에 무너뜨리며 기분 내키는 대로 변덕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시스템에 의존하는 민주국가의 리더 대신 충동적 독재자가 부상한 꼴이다.

19세기의 세 황제는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벌였지만 21세기의 세 황제는 오히려 세계를 약탈하고 지배하기 위해 힘을 합칠 위험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트럼프의 태도는 강자이자 침략국인 러시아는 존중하면서, 약자이자 피해자인 우크라이나의 국익은 오히려 무시하고 마구 대하는 모습이다. 현재 진행 중인 휴전 협상이 러시아의 영토 강탈로 이어진다면 국제사회에서 무력을 통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대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중국의 시진핑이 우크라이나 침략의 종결을 세심히 살펴보는 배경이다. 무력을 통한 침략과 영토 약탈이 기정사실로 굳어져 사후에 인정받을 수 있다면 막강한 중국은 취약한 대만을 삼킬 절호의 기회를 맞는 셈이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존재를 부정하며 러시아 민족의 일원이라고 치부하듯, 중국도 대만의 주권을 무시하며 흡수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중국의 관점에서 제국주의적 합의나 인정이 가능한 트럼프 집권기는 대만을 차지할 보기 드문 기회라고 볼 수 있다.

2025년은 분명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20세기를 지배한 냉전 체제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었다면, 21세기 시대착오적 황제와 제국의 시대는 약탈적 강대국이 서로 기득권을 인정하면서 영향권을 나눠 갖는 모습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 올해 한·미 관계에서 뼈아프게 확인했듯, 미국은 이제 상대를 형식적으로 대등하게 대하면서 제도와 규칙을 존중하는 동맹이 아니라 한낱 위성으로 여기는 오만한 제국의 태도를 보인다.

이런 시대에 상대적 약소국의 장기 전략은 미·중·러 제국에 복종하여 위성으로 전락하거나, 유럽·일본·인도·호주·캐나다 등 다른 약소 세력과 연대하여 미래의 자율성을 준비하는 길뿐이다. 미국이 전통적 동맹의 역할을 다시 담당하기를 기대할 수도 있으나, 적어도 향후 3년은 세계가 트럼프의 변덕스러운 제국주의적 약탈의 기조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전망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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