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정의의 저울’에 올려진 연극 ‘베니스의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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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정의의 저울’에 올려진 연극 ‘베니스의 상인’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고전 ‘베니스의 상인’은 현대 시각에서 여러 대목이 논란거리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의 유대인 혐오·차별이 당연시되는 설정과 유명한 반전이 일어나는 법정 장면이 진정 공정한가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극단 ‘뜬,구름’이 ‘기울어진 정의의 저울’이란 시각으로 각색한 ‘베니스의 상인’을 24~28일 서울 성북구 여행자극장에서 앙코르 공연한다. 2018년 예술공간 서울 초연 이후 다섯 번째 무대다.

이 작품은 전통적으로 알려진 ‘착한 기독교 상인 안토니오’와 ‘악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의 대립 구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16세기 상업도시 베니스(베네치아)를 배경으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조롱과 폭력에 노출된 샤일록, 그의 돈에 의존하면서도 그를 경멸하는 기독교 상인 안토니오,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사랑과 새로운 정체성을 선택하는 딸 제시카의 서사를 따라간다. 안토니오가 친구 바사니오를 위해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며 “기한 내 갚지 못하면 살 1파운드를 떼어간다”는 차용증을 쓰고 안토니오의 배가 모두 난파하면서 장난처럼 썼던 계약이 파국을 불러오는 구조는 원작과 동일하다.

하지만 다수자의 기준으로 타인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타자화의 구조’를 전면에 올린다. 기독교와 유대교, 남성과 여성, 다수와 소수, 특권층과 이방인이 뒤엉킨 베니스의 풍경을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인종·성별·지역·이념 갈등과 겹쳐 읽는 방식이다. 작품은 특히 법정 장면에 주목한다. 법학박사로 위장해 재판을 주관하는 포셔가 샤일록의 계약을 자의적으로 확장 해석하고, 그 과정에서 ‘자비’를 내세우며 재산 몰수와 강제 개종을 선고하는 모습을 비판한다. ‘선택적 공정’과 ‘공정하다고 믿는 자들의 불공정’을 드러내는 핵심 장면이다.

또한 포셔와 제시카의 서사를 병치해 ‘특권’과 ‘개척’이라는 두 축으로 현대적 해석을 시도한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아버지의 유언에 묶여 결혼 상대조차 스스로 고르지 못하는 포셔, 여성·유대인이라는 이중의 타자로서 기존 질서를 떠나 로렌조와 함께 개종을 선택하는 제시카의 길을 대비시킨다. 작품 말미에 포셔가 가부장제 속 기득권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제시카는 새 공동체에서도 영원한 타자로 남는 결말을 통해 “누가 법정의 승자인가, 누가 삶의 승자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각색·연출은 이민기(유운)가 맡았으며, 샤일록 역에 이민기, 안토니오 역에 장창완, 포셔 역에 정희경, 바사니오 역에 조영래, 제시카 역에 김하은 등이 출연한다.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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