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현지시간) 미국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측에서 제 98회 시상식의 12개 부문에 걸친 쇼트리스트, 즉 예비후보를 발표했다. 일종의 예선 통과 여부라고 보면 된다. 이중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에서 한국이 출품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도 15편으로 추려진 쇼트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올해 국제장편영화상은 세계 86개국에서 각 국가마다 대표 영화기관이 한 편씩 선정해 아카데미상 측으로 출품했다. 이란 영화임에도 합작국 중 하나인 프랑스 국적으로 출품된 ‘그저 사고였을 뿐’, 노르웨이의 ‘센티멘탈 밸류’, 브라질의 ‘시크릿 에이전트’와 함께 ‘어쩔수가없다’는 올해 국제장편영화상 4강 중 하나로 꼽힌다. 이변이 없는 한 내년 1월22일 최종 후보 5편 지명에서도 이름을 올리리란 예상이다.
한국영화가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쇼트리스트라도 올라본 건 이번이 4번째다. 2018년 ‘버닝’, 2019년 ‘기생충’, 2022년 ‘헤어질 결심’, 그리고 올해 ‘어쩔수가없다’. 이로써 분명해진 게 있다.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출품에 있어 가장 유리한 선택은 현대 한국의 중산층 윤리와 관련된 드라마란 점이다. 다른 나라들에선 치열한 정치적 환경 등을 다루는 영화들이 환영 받기도 하지만, 여기서 ‘국가 이미지’가 많이 작용한다. 한국이나 일본, 혹은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에서 기대하는 건 ‘그런 영화’들이 아니란 얘기다. 한국서 지난 세월 수없이 출품했던 각종 조선시대 사극이나 근현대사 사건 역사물 등은 더더욱 아니다. 선진화된 고도 자본주의 사회 속 윤리적 딜레마와 해체되는 전통적 사회상 등을 다루는 영화 쪽이 환영받는다.
한 마디로, 미국 입장에서의 ‘공감’ 코드다. 미국도 거의 동일하게 겪고 있지만 아직 미국영화 계에서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사회적/개인적 딜레마와 윤리적 충돌을 다룬 쪽이 높이 평가받는단 것. 굳이 말하자면 ‘자유세계의 먹고 살 만한 나라들’끼리 공감대 형성 맥락이란 얘기다. 양식적으로도 영화산업이 일정 수준 이상 궤도에 오른 선진국 영화들에선 상대적으로 높은 프로덕션 밸류를 기대하며, 개발도상국 영화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양식은 이해받기 힘들다. 한 마디로, 기준이 서로 다르단 점이 여러 차례 관찰된다.
제2차 세계대전 등 근현대사나 그보다 더 오랜 왕정시대로 접어드는 영화들 경우 미국 측에서 비교적 이해도가 높은 서유럽 영화들은 환영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당장 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 등지만 해도 해당 국가 입장에선 중차대한 역사의 변곡점격 사건이었더라도 미국 입장에선 지식 자체가 부족하고 배경이 낯설어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그렇다. 비트세대, 히피세대 중심으로 오리엔털리즘 붐이 일었던 1950~60년대엔 사극도 아카데미상 측에서 받아들여지곤 했으나, 붐이 사그라진 1980년대부턴 상황이 달라졌다. 1980년부터 44년 동안 국제장편영화상 최종 후보로 오른 7편의 일본영화 중 사극이나 근현대사 사건 영화는 ‘카게무샤’와 ‘황혼의 사무라이’ 단 두 편뿐이며, 그나마도 1950~60년대 인지도를 드높인 사무라이물이다. 저 7편 중 수상에까지 이른 두 편은 ‘굿바이’와 ‘드라이브 마이 카’, 모두 현대 사회 중산층 윤리와 관련된 드라마들이다. 이처럼 한국 의 대(對)아카데미상 전략이 가야 할 길은 생각 외로 명확하다.
한편, 이번 국제장편영화상 쇼트리스트에서 주목해 볼 만한 부분은 또 있다. 쇼트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15편 영화의 ‘국적’과 관련해서다. 물론 한 국가당 한 편씩 원칙에 따라 한 국가명 이 표시되곤 있지만 그건 출품국에 불과할 뿐,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 한 국가로 국적이 결정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당장 인터넷무비데이터베이스(IMDB) 자료상으로도 저 15편 중 단 한 국가만 표시된 영화는 5편뿐이다. 그중에 한국의 ‘어쩔수가없다’와 일본의 ‘국보’ 등이 있다. 나머지 10편은 꽤나 어마어마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팔레스타인 출품작 ‘팔레스타인 36’은 무려 11개국이 표시 된다. 프랑스, 팔레스타인,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덴마크, 요르단, 노르웨이, 미국, 스웨덴, 호주 등이다. 대부분 다국적 영화 자본과 관련해 국적이 수없이 갈라진 경우다. 앞서 언급한 이번 국제장편영화상 ‘4강’도 따지고 보면 국적이 줄줄이 늘어선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이란, 프랑스, 룩셈부르크, 미국 등 4개국이 표시됐고, ‘시크릿 에이전트’도 브라질,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4개국이다. ‘센티멘탈 밸류’는 노르웨이, 독일, 덴마크, 프랑스, 스웨덴, 영국, 튀르키예 등 7개국. 이중 유럽의 경우 워낙 자본과 인력이 원활하 게 오가는 곳이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긴 한다. 그 영향이 영화 설정에도 크게 미쳐, 2년 전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프랑스 영화 ‘추락의 해부’만 해도 프랑스 남성과 독일 여성이 영국에서 만나 아들을 낳았단 설정 아래,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가 뒤섞여 소통되는 광경들을 끊임없이 연출한다.
그런데 그 외 국가들, 남미나 중동 지역, 심지어 대만영화 ‘왼손잡이 소녀’마저 대만, 프랑스, 미국, 영국 등 4개국이 찍힌다. 물론 그게 문제란 얘긴 아니다. 민족자본주의 같은 걸 거론할 부문도 아니고, 오히려 글로벌 자본의 융성은 각 국가 영화산업에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는 일은 없다. 다만 한 국가 자본만으로 영화 한 편을, 그것도 내수시장서 큰 상업적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아트하우스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조달하긴 힘든 광경이란 얘기다. 곧 단 한 국 가만이 표시된 영화산업은 그만큼 원숙하게 자리 잡힌 왕성한 산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이 ‘단독 자본’ 위상을 과연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까. 영화시장 불황은 끝 간 데 없이 계속 진행되며, 얼마 전엔 한국의 대표적 영화작가 중 하나인 이창동 감독 신작 ‘가능한 사랑’이 국내서 투자자를 찾지 못해 결국 넷플릭스 자본에 의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서 제작에 들어가게 됐단 소식이다. 안타깝다고까지 말할 부분은 아니겠지만, 어찌 됐든 한국영화산업 현실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게 되는 대목이다. 내년 즈음 ‘가능한 사랑’이 아카데 미상을 비롯해 다양한 영화상에 출품되고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다면, 이 같은 ‘국적’ 부분은 한층 더 많은 이들에게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표식이 될 수도 있겠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