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제질서는 겉으로는 정상 작동하는 듯 보인다. 은행은 문을 열고, 공장은 생산하며, 시장은 숫자를 쏟아낸다. 하지만 팬데믹, 에너지 위기, 인플레이션, 공급망 붕괴, 주변부 전쟁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세계 시스템은 동력을 잃은 거대한 기계처럼 삐걱거린다. 내부 자원, 특히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고갈된 체제는 예외 없이 붕괴한다.
안톤 우낙 선문대 글로벌 부총장 그래서 세계는 중세의 새 왕을 기다리듯 묻는다. “누가 패권을 쥘 것인가?” 그 질문의 화살은 대개 중국을 향한다. 하지만 중국의 발전 모델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중국은 새로운 질서의 설계자가 아니라, 낡아가는 질서를 가장 크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마지막 관리자’에 가깝다. 중국은 서구의 규칙을 누구보다 능숙하게 익혔지만, 세계가 건너갈 다리를 놓기보다 장벽을 쌓는 데 익숙하다. 진짜 문제는 지정학이 아니라 문명의 엔진실, 즉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의 구조에 있다. 인간 활동의 동력은 크게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생존의 압박, 두려움, 물질적 이익, 도덕적 인정, 자아실현, 노동의 기쁨이다. 이 여섯 동력 가운데, 오늘의 세계는 오직 ‘물질적 이익’ 하나에 과도하게 의존해 왔다. 특히 물질적 이익은 고층빌딩과 고속도로, 인터넷과 소비사회를 일으킨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었다.
중국은 바로 이 동력의 정점에 선 나라다. “복종하면 풍요를 보장한다”는 암묵적 사회계약 위에서 거대한 생산기계가 되었다. 이 엔진은 이미 멈추기 시작했다. 성장의 공간이 막히고, 돈은 더 이상 의미를 만들지 못한다. 냉장고는 가득하지만 영혼은 공허해지는 순간, 풍요는 오히려 사회를 무너뜨린다.
도덕적 인정, 자아실현, 노동의 기쁨(협력의 기쁨)은 미래를 여는 동력인데, 이는 명령이나 감시, 돈으로 강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공동체로부터 존중받는 느낌, 일 자체에서 창조의 기쁨을 얻는 경험, 서로 연결되어 유용한 일부가 되는 ‘시너지’가 사회를 붙드는 접착제가 된다.
문제는 현대의 서구 금융자본주의와 그 변형인 중국식 체제가 의미가 아닌 숫자로 성공을 측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류를 다음 단계로 이끌 수 없다.
왜 지금의 자본주의가 흔들리는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팽창에 의존하지만, 유한한 지구에서 더 이상 확장할 공간은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 시장과 값싼 노동이 소진된 뒤 체제는 품질 저하와 신용 확대라는 ‘시간으로의 확장’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2008년 이후 부채 증가가 실질가치를 앞지르며 세계 경제는 중앙은행의 돈풀기에 기대 연명하는 ‘좀비 경제’가 되었다. 중국은 이 구조에 마지막으로 편입된 생산기지로, 서구의 부채 소비가 멈추는 순간 중국 모델 역시 기반을 잃게 된다. 여기에 더 근본적인 균열이 있다. ‘가격=임금+이윤’이라는 등식에서, 세계는 ‘효율’을 이유로 임금을 깎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길을 택했다. 생산기지는 해외로 옮겨갔고, 구매력은 붕괴했다. 미국의 쇠락한 공업도시가 상징하듯, 돈은 많아도 필수품 생산 기반은 취약해졌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커졌지만, 고객이 가난해지면 과잉생산으로 질식한다. 거대한 공장이 지역 자급의 시대에 적합하겠는가. 중국이 패권을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존 B. 칼훈의 ‘우주 25’ 실험이 보여주듯, 문명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목적을 잃은 풍요다. 로봇화와 AI 시대에 접어들수록 값싼 노동력에 기댄 중국식 모델은 한계를 드러내며, 패권은 더 이상 군사력이나 경제 규모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통제의 매뉴얼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비전이다.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다. 패권국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자리에서, 인류가 선택할 길은 가족을 근간으로, 자유를 책임으로 이해하며, 돈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여야 한다는 길이며, 그 가능성을 한국에서 엿보게 된다.
한국은 외부에서 볼 때 ‘기적’의 나라다. 산업과 문화(K-컬처)가 세계로 뻗어 나간다. 그러나 내부를 보면 자살률과 초저출산, 청년의 박탈감, 체제 불신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도 크다. 그래서 외형의 성장만으로는 부족하다. 물질적 이익의 시대를 넘어 도덕적 인정·자아실현·노동의 기쁨이라는 미래의 동력을 사회 안에 다시 세워야 한다. 그것은 가족과 공동체가 다시 삶의 기반이 되고, 노동이 존엄과 참여의 경험이 되며, 성과보다 기여가 존중받는 사회적 질서를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체코(슬루쇼비체 사례)와 같은 경험에서 배울 수도 있고, 일본의 ‘잃어버린 세월’에서 경고를 읽을 수도 있다. 1913년 타고르가 말한 ‘동방의 등불’은 저절로 켜지지 않는다. 세계가 길을 잃은 지금,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그 빛의 운명이 달려 있다.
안톤 우낙 선문대 글로벌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