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남정훈 기자] 여자 프로배구 IBK기업은행은 시즌 전 전망에서 도로공사와 더불어 ‘양강’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즌 첫 9경기에서 1승8패에 그쳤다. 공수에서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해줄 아웃사이드 히터 이소영이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한 데다 주전 세터 김하경도 발목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기 때문. 1m91의 장신으로 공격력에서 힘을 더해줄 것이란 기대를 모은 아시아쿼터 알리샤 킨켈라(호주)도 비시즌에 당한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인해 장점인 공격은 드러나지 않고 단점인 수비력만 부각된 것도 한 몫했다. 결국 2021~2022시즌 도중 지휘봉을 잡은 김호철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IBK기업은행은 수석코치 여오현 감독대행 체제로 팀을 빠르게 재편했고, 여 대행이 사령탑을 맡자마자 연승행진을 달리며 어느덧 중위권 도약에 성공했다. 그러나 IBK기업은행은 지난 21일 현대건설전(2-3), 24일 흥국생명전(0-3)에 연이어 패하며 여 대행 체제 후 첫 연패에 빠졌다.
연패가 장기화될 경우 선수단 사기가 처질 수 있었지만, 지난 28일 홈인 화성에서 열린 정관장전에서 세트 스코어 3-1 승리를 거두며 연패에서 탈출하며 전반기를 7승11패로 마쳤다.
여 대행 체제에서 IBK기업은행이 반등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각 포지션에 확실한 주전을 세운 것이었다. 가장 크게 흔들리던 세터 자리는 올 시즌을 앞두고 실업팀에서 수혈한 박은서에게 주전을 맡기고 있다. 2018년부터 2024년까지 흥국생명에서 뛰면서 주전 자리는 한 번도 맡지 못했던 박은서는 지난 1년간 수원시청에서 뛰다 다시 프로팀의 부름을 받고 V리그 무대로 복귀했다. 시즌 전만 해도 ‘제3 세터’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였으나 김하경의 부상과 2년차 최연진의 기복을 틈타 이제는 어엿한 주전 세터로 올라섰다.
28일 정관장전에서도 박은서와 미들 블로커 최정민의 콤비 플레이가 빛을 발했다. 이단연결이나 오픈 상황에서도 박은서는 빅토리아(우크라이나)나 육서영, 킨켈라 등 날개공격수들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코트 가운데에서 개인 시간차성의 오픈 공격을 잘 때리는 최정민을 적극 활용했고, 최정민은 블로킹 4개 포함 16점을 올리며 빅토리아(16점)와 팀 내 최고득점을 올리며 맹활약했다. 박은서와 최정민은 경기 후 나란히 인터뷰실을 찾았다. 최정민은 “연패를 끊고 승리할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고, 박은서도 “2025년의 마지막 경기에서 승점 3점을 딸 수 있어 기쁘다”라고 말했다.
이날 최정민은 무려 오픈 공격을 21차례나 시도했다. 주 공격수인 빅토리아(14개), 육서영(19개)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였다. 전위 세 자리만 시도하는 미들 블로커가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오픈 공격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그만큼 박은서는 최정민을 믿고 가운데 위로 공을 올렸고, 최정민은 박은서의 신뢰에 보답했다.
둘의 호흡에 대해 묻자 최정민은 “(박)은서 언니가 저를 평소에도 많이 좋아한다”면서 “중앙을 많이 쓰지 않으면 경기가 어려워진다는 걸 저도, 언니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상황이 급해지면 그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해서, 계속 주입시키고 있다”면서 “그러다 보니 내게 줄 타이밍이 아닌데도 제게 올릴 때가 있어서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다”라고 답했다. 이를 듣던 박은서는 “너를 믿는거지”라고 화답했고, 최정민도 “저도 언니를 믿는다”고 맞장구쳤다. 둘이 호흡을 맞추는 건 올 시즌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생의 박은서와 2002년생의 최정민은 한봄고 2년 선후배 사이다. 고교 시절에 1년간 호흡을 맞췄던 사이다. 최정민은 “고등학교 땐 미들 블로커가 아니라 날개 공격수이긴 했지만, 그때도 가운데에서 시간차성 오픈 공격을 많이 때렸다. 언니가 올려주는 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마음이 급하지 않고, 언니가 긴장만 안 한다면 잘 때릴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박은서는 “사인은 주로 정민이가 낸다. 정민이가 사인을 내면 천천히 올려주면 된다”라고 덧붙였다.
여 대행 체제에서 주전으로 자리잡은 박은서는 지난 두 경기에서 연패에 빠져 힘든 시간도 보냈다. 어렵게 다시 돌아온 V리그 무대, 그리고 찾아온 주전 세터의 자리지만 지켜야겠다는 마음보다는 팀이 먼저다. 박은서는 “주전을 지켜야한다는 부담은 없다. 저를 위해 뛰는 게 아니라 팀을 위해 뛰고 있다. 감독대행께서 저 스스로 상황을 이겨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많은 경험을 시켜주고 있다. 저는 머리가 복잡하면 잘 하던 것도 잘 안되기 때문에 최대한 단순하게 경기를 풀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답했다.
3라운드 들어 다소 블로킹 페이스가 떨어졌던 최정민이지만, 박은서의 신뢰 속에 많은 공격을 때려내며 193점으로 득점 랭킹 15위에 올라있다. 미들 블로커지만, 득점력은 웬만한 윙 공격수들을 능가하는 수치다. 블로킹 부문에서도 세트당 0.676개로 4위에 올라있어 시즌 뒤 시상식에서 베스트7 미들 블로커 부문 두 자리 중 하나를 꿰찰 수 있는 페이스다. 이에 대해 묻자 최정민은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팀이 먼저죠. 개인 기록보다는 팀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 하려고요”라고 답했다.
최악의 시즌 출발이었지만, 이후 반등을 통해 후반기 희망을 마련한 IBK기업은행이다. 두 선수의 각오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최정민은 “시즌 전엔 우리가 이렇게 밑에 있을 줄 몰랐다. 한 단계씩 올라가면서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전만큼 기가 죽어있는 느낌은 아니다”라면서 “(임)명옥 언니가 인터뷰 들어오기 전에 자기 얘길 해달라고 하더라. 경험과 기량 모두 뛰어난 명옥 언니가 코트 위에 있어준 덕분에 우린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대선배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박은서도 “2025년의 마지막 경기를 승리했으니 새해 첫 경기도 승리해서 더 위로 올라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화성=남정훈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