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3사 연말 시상식 시즌이 시작됐지만, 화제의 중심은 TV가 아닌 유튜브로 향했다. 지난 21일 오전 공개된 유튜브 웹 예능 ‘제3회 핑계고 시상식’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주목받고 있다. 방송인 유재석이 진행하는 토크 웹예능 ‘핑계고’에 한 해 동안 출연한 인물을 대상으로 한 올해 시상식에는 32명의 스타가 참석했다.
러닝타임은 2시간33분. 유튜브 동영상으로서 매우 긴 분량이지만, 3만여개의 댓글에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반응이 잇따랐다. 영상은 공개 엿새째인 26일 조회 수 1000만을 돌파했고, 29일 오전 7시 기준 약 1140만회를 기록했다.
‘제3회 핑계고 시상식’ 한 장면. 유튜브 채널 ‘뜬뜬’ 갈무리 ◆무대는 사무실, 분위기는 사모임 출연진 면면부터 화려하다. 그야말로 블록버스터급 예능이다. 배우 황정민·이성민·송승헌·이동욱·한지민·김소현, 가수 화사·우즈·정승환·페퍼톤스, 코미디언 지석진·남창희·양세찬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방송국 대형 공개홀이 아닌, 유재석 소속사이자 유튜브 제작사인 안테나 사무실에서 촬영됐다. 시상식답게 턱시도와 드레스를 갖춰 입은 출연자들이 슬리퍼를 신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풍경은 기존 시상식과 다른 정감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식순은 오프닝 근황 토크를 시작으로 시상, 엔터테인먼트 브레이크, 다시 시상으로 이어졌다. 참석자 소개와 근황 토크에만 약 50분이 할애됐는데, 맥락 없이 수다를 이어가는 방식 자체가 ‘핑계고’의 핵심 콘텐츠인 만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엔터테인먼트 브레이크에서는 럭키드로우가 진행됐다. 제주 명물 찐빵, 자연송이, 고급 커피잔 세트를 두고 추첨 경쟁이 과열되며 우스운 소동이 이어졌다. 추첨 룰을 두고 목소리를 내던 한 참석자 말을 이광수가 막자, 대선배 황정민이 “쉿” 하며 제지하는 장면에서 이광수의 얼어붙은 표정이 폭소를 자아냈다. 송승헌이 자연송이 한 상자의 주인공이 되자 의자를 번쩍 들고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 역시 웃음을 더했다.
축하공연 주인공으로 당첨된 배우 정상훈은 즉석에서 노래방 기계로 이문세 ‘깊은 밤을 날아서’를 열창했고, 출연자들은 서로의 어깨를 잡고 기차놀이를 하며 분위기를 달궜다. 화사는 ‘굿 굿바이(Good Goodbye)’를 부르며 지난달 청룡영화상에서 배우 박정민과 선보인 퍼포먼스를 배우 윤경호와 재현해 박수를 받았다. 우즈(본명 조승연)가 대표곡 ‘드라우닝’의 고음을 내지르자 현장은 스탠딩 콘서트처럼 달아올랐다.
유재석과 출연자들이 실제로 즐기며 대화하는 모습이 그대로 전달되면서, 프로그램이라기보다 지인들 연말 모임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편집 역시 ‘라이브한 감각’에 집중한다. 사회자나 수상자가 무대 앞에 나서면 롱숏을, 농담에는 객석 리액션 컷을, 예상치 못한 반응에는 즉각적인 클로즈업으로 현장감을 살렸다. 노래 부를 사람을 뽑는 순간 “안 걸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내향형’ 한지민 반응처럼, 출연자들의 실시간 반응과 숨은 표정까지 포착해 현장감을 더했다. ◆폐쇄적 권위 대신 따뜻한 웃음
‘핑계고 시상식’에는 어거지식 공동 수상도, 쪼개기식 수상도 없다. 시상식에 불참했다고 해서 상을 주지 않는 관행도 없다. 신인상·인기상·최우수상·대상·작품상 등 각 부문 수상자는 전문 심사위원 평가 또는 구독자 온라인 투표로 선정된다. 심사에는 외부 TV방송과 유튜브 프로그램 제작진이 참여하며, 심사 결과와 심사평은 모두 공개된다.
초대 이동욱, 제2회 황정민에 이어 올해 영예의 대상은 지석진에게 돌아갔다. 투표에 참석한 구독자 9만7000여명 중 64%의 지지를 받았다. 연예 인생 처음으로 대상 트로피를 품에 안은 그는 담담한 소감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댓글에는 “내가 보고 싶었던 시상식이 바로 이거다”, “지상파 3사 시상식은 안 보지만 핑계고 시상식은 무한 반복한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다중의 공감을 잃은 업계 내부 폐쇄적 행사에 머물고, 억지로 넣은 상황극과 대본 위주 멘트로 재미를 잃어온 기존 시상식과의 분명한 차별성이 흥행 요인으로 꼽힌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권위는 추락하고 재미는 사라진 (기존) 시상식에 대한 실망감이 누적됐다”며 “돌아가면서 상을 받고 의례적인 멘트를 하는 딱딱한 분위기와 달리, ‘핑계고’ 시상식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라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재미는 물론 인간적인 정이 느껴져 시청자들이 기분 좋고 편안하게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규희 기자?l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