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재난 대응 시스템의 핵심은 분명하다. 누가 지휘하는지가 명확해야 하고, 현장은 매뉴얼을 숙지한 채 즉각 실행할 수 있어야 하며, 사고 이후 책임이 흐려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부처 간 책임 떠넘기기,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 역할 혼선, 사고 수습 이후 흐지부지되는 제도 개선이 반복돼 왔다.
특히 더 큰 불신을 낳는 지점은 ‘사고 이후의 국가 역할’이다. 초기 대응 실패보다 심각한 문제는 같은 유형의 사고가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이는 매뉴얼이 현실에 맞게 개선되지 않았거나, 개선되더라도 훈련과 점검이 형식에 그쳤다는 방증이다. 매뉴얼이 책장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안전 장치가 아니라 책임 회피용 문서에 불과하다.
선진국의 위기 대응 시스템이 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재난 대응을 개인의 헌신이나 현장 판단에만 기대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상시의 반복 훈련, 권한과 책임의 명확화, 실패를 제도적으로 학습하는 체계가 시스템의 핵심이다. 사고를 ‘불가항력’으로 정리하는 순간, 다음 사고는 이미 예고된 재난이 된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이는 어떤 정치적 성과나 행정 효율보다 앞서는 가치다. 안전을 비용으로 계산하거나 책임을 분산시키는 순간, 국가는 신뢰를 잃는다. 특히 항공·교통·재난 분야의 안전은 선택적 정책이 아니라 국가 존립의 기본 조건이다.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재난 대응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질하며 중앙정부의 지휘권과 지방자치단체의 현장 권한을 명확히 구분했다. 독일 역시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 위기 대응 매뉴얼을 통합하고, 정기적인 실전형 훈련을 통해 ‘누가, 언제, 무엇을 결정하는지’를 반복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대책 발표가 아니다. 매뉴얼이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지를 점검하고, 작동하지 않는다면 과감히 고쳐야 한다. 지휘 체계는 단순하게, 책임은 명확하게, 훈련은 실전처럼 바뀌어야 한다. 사고가 날 때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마침 이재명 대통령은 무안공항 참사 1주기를 맞아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의 독립성과 전문성 강화를 적극 뒷받침하고, 여객기 참사의 원인 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형식적 약속이나 공허한 말이 아닌 실질적 변화와 행동이 필요하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제 그 약속이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가 국민 신뢰의 관건이다.
기본과 상식은 분명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앞에서 국가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무안공항 참사 1주기가 남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다음 위기에서도 우리는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국가 위기 대응 시스템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으로, 문서가 아니라 현장으로 증명돼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 국가에 요구하는 최소한의 책임이다.
[사진=Notebook LM 인포그래픽] 아주경제=유영훈 기자 ygleader@a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