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논설고문] 병오년 새해, 남북관계에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일까. 전망은 극히 어둡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3년 12월 3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는 더 이상 동족,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선언했다. 이후 남북관계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북은 대남 사업기구들까지 정리, 개편했고, 남북관계와 관련된 유산들도 모조리 지워버렸다.
이유는 자명하다. 미국과 한국 정부에 대한 실망감 탓이다. 2018년 4월~9월 김정은-트럼프 간 일련의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대북제재 해제에 진전이 없자 극도의 실망감이 단절과 증오로 표출된 것이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대화, 사람, 차량 왕래가 완전히 끊겼다”면서 “그 자리엔 대북 전단과 쓰레기 풍선, 양쪽에서 틀어대는 확성기 방송만 넘나든다”고 했다.
남북이 아무리 서로를 적대시한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대화가 가능한 최소한의 통로와 공간은 열려 있어야 한다. 북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때로는 공격도, 비난도 하지만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남북대화 복원에 대한 이재명 정부의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지난달 19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북한을 움직일 평화 보따리이자, 새로운 교류협력을 위한 창의적 접근”이라면서, 서울~평양~베이징을 연결하는 고속철도 건설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그런 사업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북은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미사일 개발을 강행해 유엔 안보리와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다. 정 장관의 고속철 제안이 실현되려면 대북제재가 최소 5개는 풀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다른 사업 제안들, 예컨대 원산·갈마 지구 관광사업이나, 북의 광물 희토류 수출대금으로 북 주민들의 민생 의료물자를 수입한다는 신(新)평화교역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정 장관은 이날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2026년 새해를 한반도 평화공존의 원년으로 만든다”는 목표 아래 △북미대화·남북대화의 재개와 평화공존의 제도화 △새로운 교류협력을 위한 창의적 접근 △ 접경지역의 평화구축과 민생경제 활성화 △분단고통 해소와 인도적 현안 해결 △평화통일 공감대 형성을 위한 국민 경청의 확대( 국민경청단 구성) 등을 5대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대부분 역대 정부가 내걸었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눈길을 끄는 게 있다면 김정은이 밝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통일 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 관계로 본다는 언명 정도. 이마저도 정색을 하고 들여다볼 사안은 아니다. 우리 헌법 상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로 돼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실질적으로는 오래전부터 남북 특수관계에 따른 2개의 국가로 인정받아 왔다는 게 맞다.
정 장관의 귀환(歸還)과 함께 이른바 자주파와 동맹파 간 논쟁이 재연되는 것도 흥미롭다. 이론적으로 뚜렷한 정의(定義)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맹파는 한·미동맹(국제관계)을, 자주파는 남북관계(민족)를 더 중요시한다고들 한다. 최근에는 정 장관은 자주파로, 정통 외교관 출신인 위성락 안보실장은 동맹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윤석열 정권 때는 확실히 동맹파의 시대였다. 극우라는 말까지 나왔으니까. 이재명 정권에선? 분위기가 자주파 쪽으로 기울었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최근 자주파의 대부 격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대통령 주변에 동맹파가 너무 많아 아무것도 못 한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통일부·외교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남북 간 신뢰 조성은 통일부의 역할”이라고 했다. 정동영 장관(자주파)과 위성락 안보실장(동맹파) 간 주도권 논란에서 정 장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면서 위 실장에겐 “경제영토의 확장”을 당부했다.
이 정권의 여권 실세들과 원로들 사이에 형성된 오랜 ‘좌파 케미’의 위력을 절감한다. ‘케미’는 케미스트리 (chemistry)의 줄임말로 ‘서로 잘 맞는다. ’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진보좌파에겐 특유의 ‘좌파 케미’가 있다. 굳이 부른다면 좌파연대’連帶)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연대’라는 표현은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케미’가 그보다 훨씬 덜 위압적으로 들린다. 그 가벼움과 포섭력으로 뭐든 흔적 없이 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정 장관은 최근 유엔군사령부(유엔사)가 갖고 있는 비무장지대(DMG) 출입 허가권한도 문제 삼았다. 김현종 국가안보실 1차장이 DMZ 내 백마고지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을 방문하려다 유엔사에 의해 제동이 걸리자 반발한 것. 정 장관은 이 문제를 영토주권의 문제로 보았으나, 유엔사는 영토주권이 아닌 관할권 문제로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도 후자가 맞는 것 같다.
이재명 대통령도 ‘자주파 케미’에 자주 힘을 보탠다. 대통령은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에 대한 접근 제한을 원칙적으로 철폐하고 즉각 개방할 것을 주문했다. 노동신문을 개방하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 국민을 주체적 존재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북의 선전 선동에 넘어갈 존재로 취급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북 노동당기관지인 노동신문은 다른 매체와는 성격도 비중도 다르다. 노동신문은 북의 사회주의혁명과 노동계급화의 절대적 수단이자 도구다. 풀어주면 당장 우리 내부에서부터 “합법적으로 노동신문을 보는데 왜 문제 삼는가?”라고 반발할 수 있다.
우리가 서울에서 북한방송을 듣는 것과 똑같은 딜레마가 생길 수도 있다. 지금도 남쪽에선 북한방송은 마음만 먹으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부가 그걸 ‘공인’해 주는 것과는 다르다. 원래 신문 방송 해금은 남북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이뤄져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상호주의’라는 말 자체가 사치스럽다. 이를 감당하고, 안하고를 떠나 그렇게 풀어주는 게 과연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자니스(Irving Janis)는 1972년 (Victims of Groupthink)이란 책을 썼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구성원들이 모두 같은 학교, 같은 직장, 같은 노선, 같은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 동화(confirmity)로 인해 잘못된 결정을 내릴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지금도 정책결정론의 고전적 명저로 꼽힌다.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아주경제=이재호 논설고문 leejaeho642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