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80년은 쉽지 않았지만 특유의 저력으로 역경을 이겨냈다. 80년의 헤리티지를 가슴에 품고 100년 기업을 향해 나아가겠다. ”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달 5일 기아 창립 80주년 기념식에서 이같이 말했다. 80여년 전 자전거 부품 회사에서 출발한 기아는 이제는 미래 모빌리티 혁신 기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전 국민을 실어나른 ‘봉고’에서 시작해 목적에 맞춰 내부 구조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전기차인 PBV(목적 기반 모빌리티)까지 진화한 기아의 승합차들이다.
1984년 강원 강릉시 주문진해수욕장 인근에 조성된 봉고 캠프촌에서 봉고 차주를 비롯한 가족들이 휴가를 보내고 있다. 기아 제공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자동차 산업 통폐합 조치로 인한 위기 극복을 위해 출시된 봉고는 ‘승합차=봉고’라는 국민적 인식을 만들어낼 정도로 인기를 끌며 기아를 살렸다. 기아의 PBV 첫 라인업인 PV5는 중국발 저가 공세에 맞선 전략 카드로서 기아의 미래 모빌리티 구상을 담고 있다. ‘봉고 신화’의 주역인 기아의 승합차를 통해 한국 모빌리티 산업의 진화 과정을 살펴본다.
기아 봉고(1981) ◆대위기 속 출시… ‘봉고 신화’ 탄생 1981년 출시된 봉고는 기아의 절체절명 위기 속에 탄생한 구원 투수였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한국 자동차 기업들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자 1980년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에 나섰다. 승용차 생산 권한은 현대차와 새한자동차에 주고 기아는 중소형 트럭과 버스만 생산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오일 쇼크 직전 승용차 생산 시설을 2배나 늘린 기아를 사실상 부도 위기로 내몬 것과 같은 조치였다.
그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기아는 단 한 가지 차종에 회사의 명운을 걸었다. 봉고 트럭과 다목적 승합차인 12인승 봉고 코치였다. 기아는 유치원, 학원, 병원, 교회, 동호회, 중소기업 등 각종 현장에 쓰이는 봉고 앨범을 제작했고, ‘봉고의 용도는 이렇게 다양하다’고 홍보하며 마케팅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부었다. 때마침 봉고에 대한 개인등록이 허용된 게 수요 창출의 기폭제가 됐다.
이전까지 승합차는 사업용 차량으로 분류돼 개인이 이용하는 건 불법이었다. 느슨한 단속을 틈타 서류를 위조해 사용하는 ‘위장 등록’이 판을 쳤지만, 1982년 개인 등록이 공식 허용되면서 봉고는 단숨에 국민 승합차로 자리 잡았다. 자가용 보급 초기였던 1980년대는 폭증한 이동 수요에 비해 대중교통 등 사회 기반이 부족했다. 봉고는 차량 한 대로 사람과 짐을 날랐고, 때로는 이동 광고판이자 야외 사무실로도 쓰였다. 명절에는 고속버스나 열차 좌석을 구하지 못한 귀성객들이 봉고에 나눠 타 단체로 이동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봉고 하나로 대박을 터트린 기아는 1983년 출시 2년 만에 매출 4029억원에 순이익 291억원을 기록하며 당시 100대 상장기업 중 순이익 1위에 올랐다.
기아 베스타(1986)
기아 토픽(1987)
기아 프레지오(1995) ◆패밀리카 역할은 미니밴으로 이동 봉고 후속인 베스타, 토픽, 프레지오가 1990년대까지 승합차 시장의 성장을 견인했지만, 자동차산업 시장 발달과 함께 승합차는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 기아조차 2006년 프레지오 단종(생산 종료)을 결정한 뒤 더 이상 ‘순수 승합차’는 개발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동차 수요가 다양해지면서 가족 차량에는 미니밴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물류에는 전용 트럭, 출퇴근에는 대중교통과 기업 셔틀, 여행에는 레저용차량(RV)이 이용된다. 택시, 렌터카, 차량 공유 시스템이 발달하며 이동 문제를 해결할 수단도 늘었다. 또한 선진국형 각종 규제가 더해지며 과거 봉고처럼 내부 설계가 고정된 차량 하나를 ‘대충 다 되는 차’로 이용하는 건 불법에 가까워졌다.
특히 기아가 1998년 현대차에 인수됨에 따라 그룹 내 중복 라인 정리가 이뤄지면서 승합차 판매는 현대차의 스타렉스로 무게가 옮겨졌고, 가족을 위한 다인승 수단으로는 미니밴 분야의 대표 주자인 카니발이 역할을 흡수했다. 현재의 기아 봉고는 현대차의 포터와 함께 소형 운송을 담당하고 있다.
기아 PV5(2025) ◆미래 모빌리티 상징, PV5로 부활 PV5는 기아의 승합차 계보에서 약 20년 만에 다시 등장한 모델로 단순 승합차가 아닌, 기아가 그리는 미래 모빌리티 구상이 담겼다. 기아는 2년 전 세계 최대 전자·정보기술(IT) 박람회인 ‘CES 2024’에서 사용 목적에 따라 차량 공간을 재설계하는 ‘플랫폼 차량(Platform Beyond Vehicle, PBV) 개발 구상을 발표했다. PBV는 차량 크기에 따라 PV1(소형), PV5(중형), PV7(대형)으로 나뉘는데 첫 출시작이 PV5였다. PV5는 좌석 모듈 장착 모델인 ‘패신저’와 화물 모듈인 ‘카고’ 두 종류가 있다.
봉고가 ‘사람·짐을 태우는 차’였다면 PV5는 ‘역할을 태우는 차’라는 게 기아의 설명이다. 기아는 “사용 목적이나 고객 수요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되는 PV5는 라이드헤일링(스마트폰 앱으로 차량을 호출하는 이동 서비스), 로보택시, 배송, 물류 등의 각종 모빌리티 서비스를 아우르는 새로운 비즈니스 플랫폼”이라고 소개했다. 단순히 차를 판매하는 게 아니라 이동 솔루션을 제공하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 PV5는 택시, 배송차, 셔틀, 물류차를 각각 따로 만드는 대신 하나의 차를 필요에 따라 바꿔 쓸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차량이다. 아침에는 회사 직원을 나르는 셔틀로 사용하다가, 오후에는 좌석을 빼고 택배·물류 차량으로 이용하고, 밤에는 무인 로보택시로 활용하는 식이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이미 포화가 된 미니밴·승합차 시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차량 특성상 일회성 판매가 아닌 모듈 교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등 지속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봉고만큼 국민적 열풍을 얻기는 힘든 시대가 됐지만,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다양한 이동과 물류 공급을 담당하며 현대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란 비전이 담겼다. 기아 관계자는 “교통 사각지대 없이 누구나 편리한 이동의 권리를 누리고, 보다 효율적인 물류가 현실화되는 모빌리티 비전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