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5도의 매서운 칼바람이 풀던 지난 5일 저녁 9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휴가를 나온 군인부터 야근을 마친 직장인, 수능을 끝낸 수험생까지 접점 하나 없어 보이는 이들은 서로를 확인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경도(경찰과 도둑)세요?”
‘경도’는 ‘경찰과 도둑’의 줄임말로, 경찰과 도둑으로 역할을 나눠 술래잡기하는 놀이를 뜻한다. 최근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을 중심으로 경도 모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당근에 따르면, 지난달 경도 관련 검색량은 전월 대비 약 670배 급증했고, 경도 모임 수도 29배 늘었다.
실제로 당근 앱에서 경도 모임을 검색하면 ‘용산 경도’, ‘고양 경도 모여라’, ‘순천 경도 할 사람’, ‘대전 20대 경찰과 도둑’ 등 다양한 지역 기반의 모임이 줄을 잇는다.
경도의 규칙은 간단하다. 참가 인원 중 도둑 역할을 맡게 된 이들은 게임 시작 후 1~2분간 몸을 숨길 시간을 갖는다. 이후 경찰이 수색에 나서고, 잡힌 도둑은 감옥으로 연행된다. 잡히지 않은 도둑은 감옥을 지키는 교도관(경찰)의 눈을 피해 수감된 도둑을 터치시켜 동료를 탈옥시킬 수 있다.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강공원에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기 위해 참가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몸풀기 게임으로 꼬리잡기를 했다. ◆‘계주 선출’ 기자가 직접 뛰었으나…가장 먼저 잡혀
이날 모인 33명은 대부분 2030세대였다. 추운 날씨 탓에 다들 귀마개와 모자, 패딩 등으로 중무장을 했다. 본 기자도 파란색 털모자에 털장갑, 핫팩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본격적인 게임에 앞서 ‘국민체조’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꼬리잡기’ 등 어린 시절 즐기던 익숙한 놀이로 몸을 풀었다.
기자는 첫 번째 게임에서 도둑 역할로 참여했다. 넓은 한강 공원에 마땅히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행인인 척 걸어봤지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행동과 눈에 띄는 파란 모자 탓에 시작한 지 1분여 만에 바로 정체가 발각됐다.
기자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도둑이다!”라고 외치자마자 주변을 수색하던 경찰 3명이 바로 쫓아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항상 계주 선수로 뽑혀 달리기는 자신 있었지만 제일 먼저 붙잡힌 도둑이 됐다.
본 기자는 첫 번째 게임에서 제일 먼저 잡힌 도둑이 돼 지정된 자리(감옥)에 앉아있다. 반전은 감옥에서 벌어졌다. 서로 처음 보는 터라 누가 같은 편인지 헷갈리는 상황을 이용해 한 도둑이 교도관에게 접근했다.
“도둑을 어떻게 풀어주는 거예요?” (도둑5)
“그냥 손바닥 터치하면 돼요” (교도관)
질문을 던진 도둑은 “아 그래요?”라며 감옥 안의 도둑들과 순식간에 연속으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동료들을 탈출에 성공시켰다. 경찰 입장에서는 눈 뜨고 코 베인 격이다. 첫 판은 도둑의 승리로 끝났다.
◆두 번째 판도 도둑, 전략적으로 접근하다
두 번째 판에서도 기자는 도둑 역할을 맡았다. 노하우가 생긴 경찰들은 포위망을 한층 좁혔다. 도둑들은 주변의 앙상한 나무 등 지형지물을 활용해 최대한 몸을 숨겼다. 이번 판에서는 다른 도둑들이 잡힐 때 몰래 가서 풀어주는 게 기자 나름의 전략이었다.
5분 정도 흘러 동료들이 여럿 잡힌 것을 확인하고 나서 과감히 감옥으로 향했으나, 감옥을 지키고 있는 교도관에 의해 바로 제압됐다. 다른 도둑들도 동료들을 탈옥시키려고 애썼지만 두 번째 판은 경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경찰에 잡힌 도둑이 감옥으로 연행되고 있다. ◆신난 참가자들 “쫓기듯 뛰어본 것 오랜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추격전을 마무리한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참가자들은 벌건 얼굴을 한 채로 동네 친구마냥 다른 참가자와 소감을 나눴다.
서울 동작구에서 온 한 30대 남성 참가자는 “어렸을 때도 경찰과 도둑을 재미있게 했지만 이렇게 성인 돼서 낯선 사람들과 순수하게 뛰어놀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면서 “처음에 어색했는데 뛰어놀다 보니 금방 친해졌다”고 말했다.
직장 선배와 함께 온 30대 여성 참가자도 “요즘에는 신호등도 안 뛰는데 이렇게 누구한테 쫓기면서 뛰어본 게 오랜만인 것 같다”며 “기회가 되면 또 다른 경도 모임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모임을 연 주최 측은 “‘어른이(어린이+어른)’들을 위한 경도를 하고 싶어서 주최했다”며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이라 그런지 서로 양해를 구하고 진행을 잘 따라줬다. 매너 있는 모습이 빛났다”고 소감을 전했다.
일반 시민과 참가자를 구별하기 위해 경도 참가자는 야광팔찌를 착용했다. ◆왜 2030세대는 경도에 열광할까?
전문가들은 경도 열풍을 두고 단순한 유행을 너머 공통의 취향을 매개로 한 느슨한 연결의 확장으로 해석한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부담없이 모였다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식이 최근 2030세대의 인간관계 양상과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세계일보에 “경도도 러닝 크루처럼 같은 취향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이는 문화”라며 “어렸을 때 즐기던 놀이를 낯선 사람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추억과 신체 활동이 결합된 몰입감있는 행위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준영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도 “경도 모임은 목적에 맞게 즐기고 쿨하게 헤어지는 이른바 목적형 인간관계 일종”이라며 “요즘 같은 디지털 과잉 시대에는 육체적으로 뛰어놀며 피로를 해소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글·사진=윤성연 기자 y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