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AI는 이제 ‘말’이 아니라 ‘몸’을 가졌다이번 ‘CES 2026’을 직접 보고 느낀 점은, CES가 더 이상 기술의 가능성을 전시하는 무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술이 실제 산업 현장에 들어가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선언하는 자리였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 중심에는 ‘피지컬 AI’가 있다. 생성형 AI가 언어와 이미지를 다루는 기술이라면, 피지컬 AI는 로봇과 기계, 차량이라는 ‘몸통’을 움직이는 AI다. 이번 CES에서 이 흐름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의 단계로 넘어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각 기업이 제시한 휴머노이드 로봇의 양산 계획이다. 현대자동차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을 연간 수만 대 규모로 생산하겠다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했다. 단순 시연이 아니라 실제 공장에 투입해 반복 작업과 조립 공정을 맡기겠다는 계획이다. 로봇이 걷고 물건을 옮기는 수준을 넘어, 생산성을 논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CES 현장에서 로봇은 더 이상 ‘미래 기술’이 아니라 ‘노동력’이었다.
이 변화는 특정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중국·한국 기업들이 앞다퉈 휴머노이드와 산업용 로봇을 내놓고 있다. 가정용 로봇, 물류 로봇, 제조 로봇이 동시에 진화하는 모습은 산업 전반의 구조 변화를 예고한다. AI가 인간의 판단을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의 물리적 역할까지 흡수하는 국면이 열린 것이다.
이 흐름의 또 다른 축은 반도체와 플랫폼 기업이다. 로봇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연산 능력과 학습 데이터다. 이번 CES에서 반도체 기업들이 로봇과 자율주행을 핵심 성장축으로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는 더 이상 소프트웨어 기업만의 영역이 아니다. 공장과 도로, 물류창고를 연결하는 산업 인프라로 재편되고 있다.
(왼쪽부터) 보스턴다이나믹스 아야 더빈 휴머노이드 응용전략 담당, 잭 재코우스키 아틀라스 개발 총괄이 발표하는 모습 [사진=현대차] 흥미로운 점은 국가별 온도 차다. 미국·중국·한국은 공격적으로 로봇과 AI를 결합하고 있지만, 한때 로봇 강국으로 불리던 일본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다. 기술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AI와의 결합에서 주도권을 잃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특허와 투자 흐름은 기술 경쟁의 방향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물론 넘어야 할 장벽도 분명하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산업 현장에 안착하려면 신뢰성과 안전성, 그리고 인간과의 공존 규칙이 필요하다. 사람이 상시 감시해야 하는 로봇은 생산성만 따져 투입할 수 없다. 규제와 제도 논의 역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CES 2026’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AI를 ‘말 잘하는 기술’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산업을 움직이는 ‘몸 있는 기술’로 받아들일 것인가. 피지컬 AI의 확산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시작된 변화다. 한국 산업은 이 흐름의 관람객으로 남을지, 설계자로 설지 전략적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② 사라진 거대 부스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다음으로 넘어갔다‘CES 2026’에서 눈에 띈 또 하나의 변화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전통적인 주역들의 ‘거리 두기’였다.
한때 CES의 얼굴이었던 글로벌 대기업들은 전시 방식 자체를 바꿨다. 단순한 비용 절감이나 일시적 전략 조정으로 보기에는 공통점이 분명하다. CES를 바라보는 기업들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일본을 대표해 CES에 50년 넘게 참여해온 소니는 더 이상 ‘소니그룹’의 이름으로 메인 전시장을 채우지 않았다. 대신 모빌리티 합작법인이라는 보다 좁고 명확한 주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철수가 아니라 집중에 가깝다. 소니는 이미 ‘가전 회사’가 아니다. 콘텐츠와 플랫폼, 이미지 센서를 축으로 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변모했다. 제품을 줄지어 세워놓는 방식의 전시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
소니혼다 모빌리티가 공개한 전기차 '아필라'. [사진=CES특별취재단] 삼성전자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수십 년간 CES 최대 부스를 운영해온 삼성전자는 올해 전통적인 전시장 대신 별도의 공간을 선택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에서, 핵심 파트너와 고객을 겨냥한 선택적 소통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제 글로벌 대기업은 CES가 아니어도 스스로 주목을 만들 수 있다. 발표 시점도, 방식도 기업이 결정한다.
이 변화는 CES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CES는 더 이상 ‘가전 박람회’가 아니다. 주문을 받고 신제품을 비교하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오늘날 CES의 주인공은 스타트업과 기술 플랫폼, 그리고 산업 간 결합이다. 수천 개의 작은 기업들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들고 나와 파트너를 찾는다. 대기업이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CES의 의미가 줄어들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반대다. CES는 이제 기술의 쇼룸이 아니라 산업 질서가 교차하는 광장이 됐다. 규제·표준·투자·정책 신호가 오가는 자리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전시 규모를 줄이면서도 주최 기관과의 관계는 유지한다. 존재감을 줄이되, 연결 고리는 놓지 않는 전략이다.
이 장면은 한국 기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CES에 ‘얼마나 크게 나가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왜 나가는지’다.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인지, 정책 신호를 읽기 위해서인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목적이 흐릿해질수록 부스는 커지고, 메시지는 약해진다.
③ CES를 정면으로 파고든 중국 기업‘CES 2026’에서 또 하나 분명해진 장면은 중국 기업들의 존재감이다. 요란하지는 않지만, 이전보다 훨씬 전략적이었다. 관세와 규제, 미·중 갈등이라는 구조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중국 기업들은 CES를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는 통로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CES는 오랫동안 방향성을 고민해온 전시회다. 자동차 중심 전시라는 평가를 받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다시 소비자 제품과 AI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변화는 중국 기업들에게 오히려 기회가 되고 있다. 하드웨어 제조에 강점을 가진 중국 기업들은 AI를 결합해 스스로를 ‘저가 제조업체’가 아닌 기술 기업으로 재정의하려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레노보다. 한때 PC 브랜드로 인식되던 이 기업은 이제 디바이스·솔루션·소프트웨어 전반에 AI를 핵심으로 심고 있다. CES 기조연설에 직접 나서는 동시에 별도의 대형 행사를 병행하는 방식은 중국 기업들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CES라는 무대가 여전히 글로벌 인지도를 높이는 데 유효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CES에 마련된 하이센스 전시장. [ 사진=CES 특별취재단] 중국 TV 제조사들의 행보도 눈에 띈다. TCL과 하이센스는 단순한 제품 나열이 아니라 ‘규모와 위치’로 메시지를 던진다. 전시장 한복판의 대형 부스는 여전히 상징적이다. 중국 기업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관세 장벽이 존재하더라도 미국 소비자와 시장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이러한 자신감의 배경에는 이미 미국 사회 깊숙이 스며든 중국 디지털 서비스의 존재가 있다. 짧은 영상, 전자상거래, 생성형 AI까지 중국발 서비스는 미국 이용자들의 일상에 자리 잡고 있다. CES는 이 흐름을 오프라인에서 확인하는 공간이 됐다.
주목할 점은 CES 주최 측의 태도다. 미 소비자기술협회(CTA)는 미·중 갈등 국면에서도 중국 기업의 참여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CES를 갈등의 전장이 아니라 기술과 산업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플랫폼으로 유지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이는 CES가 단순한 전시회를 넘어 기술 외교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④ CES가 한국 기업에 던진 불편한 질문‘CES 2026’을 관통한 키워드는 기술도, 전시 규모도 아니었다. 전략의 선명함이었다. 미국 기업은 무대를 재정의했고, 중국 기업은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은 무엇을 보여줬는가.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CES에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전시관 곳곳에서 한국 기업의 이름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기술력도 여전히 경쟁력이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한국 기업의 CES 전략을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의 CES 참여는 여전히 관성에 기대는 모습이 적지 않다.
“매년 나가니까”, “빠지면 안 되니까”라는 이유가 전략을 대신한다. 전시는 유지되지만 메시지는 분산되고, 기술은 많지만 이야기는 약해진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기획과 판단의 문제다.
‘CES 2026’의 중심에 있던 피지컬 AI와 산업 전환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은 로봇·반도체·제조 역량을 동시에 보유한 드문 나라다. 그럼에도 CES 현장에서 한국이 ‘산업 전환의 설계자’로 읽혔는지는 의문이다. 개별 기술은 보였지만, 산업을 어떻게 재편하겠다는 그림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6에 'AI 기반 혁신 선도'를 주제로 마련된 LG전자 북미이노베이션센터(LG NOVA) 부스에 관람객들이 북적이고 있다. [사진=LG전자] 이제 한국 기업은 CES에서 세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산업의 미래를 말하고 있는가.
-이 전시는 누구를 설득하기 위한 자리인가.
-CES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부스의 크기와 화려함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 CES는 더 이상 ‘참가 자체’로 평가받는 무대가 아니다. 전략 없는 참여는 존재감을 키우지 못한다.
‘CES 2026’은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기술 경쟁은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제는 누가 더 많은 기술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누가 그 기술을 산업과 이야기로 묶어내는지가 승부를 가른다. 한국 기업이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CES는 더 이상 기회의 무대가 아니라 비용의 무대가 될 것이다.
라스베이거스(미국)=한준호 편집국장 hanjh@a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