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30일 경북 경주 APEC 정상회의장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기념촬영 후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3~14일 일본 나라(奈良)에서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첫 일본 방문이자, 일본이 수도 도쿄가 아닌 ‘고도(古都)’ 나라를 회담 장소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번 회담은 시작부터 강한 정치·외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일본 내에서는 이를 두고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그만큼 커졌다는 방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상회담 장소로 선택된 나라는 다카이치 총리의 정치적 기반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1993년 총선에서 나라 지역구로 처음 국회에 입성한 이후 10선에 성공한 정치인이다. 정상회담을 수도 밖에서 여는 방식은 외교적으로 드문 선택은 아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16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자신의 지역구였던 야마구치현 나가토로 초청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5년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시안으로 불러 회담을 연 사례가 그 예로 거론된다.
외교 현장에서는 이러한 장소 선택이 상징적 의미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다카이치 총리의 ‘안방’으로 초대함으로써 양 정상이 보다 친밀한 분위기에서 개인적 관계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번 회담 장소로 거론되는 나라에는 일본 불교 문화의 상징인 동시에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의 후손이 조성에 관여한 금동대불로 유명한 사찰 도다이지(東大寺)가 있다. 일본 언론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지식인 집단이 일본 국가 형성기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공간”이라고 평가한다. 중국이 근현대사를 매개로 한국에 접근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고대사를 통해 한일 협력의 뿌리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읽힌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중국은 최근 한·중 정상회담에서 항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공통의 역사 자산으로 강조하며 한국에 전략적 선택을 요구했다. 이를 바라보는 일본은 이러한 중국의 역사 공세가 한·미·일 협력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외교적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는 평가가 일본 내에서 나온다.
이 같은 인식 변화의 배경에는 급변한 국제 환경이 자리하고 있다. 미·중 갈등이 구조적으로 고착화되는 가운데,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 이후 중·일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중국은 일본에 대해 희토류를 포함한 이중용도 물자 수출 통제, 반도체 관련 압박, 동중국해 가스전 문제 등으로 전방위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외교적 선택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본 언론도 한국을 더 이상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독도(일본명 다케시마) 문제와 관련해 “지금은 국민 감정보다 안보와 경제 환경이 훨씬 중요한 시점”이라며, 다카이치 총리에게 신중한 대응을 주문했다.
여기에는 한·일 양국이 ‘미들 파워’로서 협력하지 못하면 미·중 양강 구도 속에서 오히려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닛케이는 “막강한 힘을 배경으로 자국 중심의 외교 정책을 강화하는 미국과 중국에 휘둘린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은 공통점이 많다”고 평했다.
물론 일본이 역사·영토 문제에서 기존 입장을 바꾼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다만 이를 전면에 내세워 한·일 관계를 경색시키기보다는 당분간 관리·유예하면서 전략적 협력을 우선하겠다는 계산이 엿보인다. “독도 문제로 한국을 잃을 여유가 없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 등 역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닛케이는 “최근의 한·일 양국 정상은 이러한 문제들이 양국의 전략적 협력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의지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 같은 외교 기조는 일본의 국내 정치 일정과도 맞물려 있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다카이치 총리는 통상국회 개회 직후 중의원을 해산하고, 2월 조기 총선을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높은 지지율을 배경으로 ‘강한 경제’와 적극 재정을 내세워 국민적 신임을 다시 확인하겠다는 구상이다.
동시에 중·일 관계 악화라는 외부 리스크 속에서 정권 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한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한·미·일 협력의 축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국제 사회와 국내 유권자 모두에게 긍정적인 신호가 될 수 있다.
아주경제=최지희 도쿄(일본) 통신원 imzheeimzhee@a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