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의 신간 낸 ‘노동시 거목’ 백무산 “멈추지 않는 기차 같은 경쟁사회… 멈추고 덜어내보세요”

글자 크기
5년 만의 신간 낸 ‘노동시 거목’ 백무산 “멈추지 않는 기차 같은 경쟁사회… 멈추고 덜어내보세요”
수렁에서 태양 가득했던 젊은 날로 옛친구의 전화로 잊었던 기억 소환 생각 바뀌면 과거도 다시 태어나죠 깊은 병 있는 줄 모르고 사는 현대인 멈추지 않으면 세상 실체 실감 못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별은 빛나요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요구가 요원의 들불처럼 일어나던 어느 날, 그는 “봉인된 기억 속”에 있던 오래된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20대에 함께 공장에서 일했던 친구에게서 온, 아주 오래간만의 전화였다.

친구는 통화에서 그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상기시켜 주었다. 친구가 들려준 자신의 20대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자신이 알고 있던 자신의 과거가 조금씩 바뀌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둡고 “질척한 수렁” 같았던 과거에서 “태양 가득했던 짧았던 젊은 날의 파도 소리”로.

한국 노동시의 거목 백무산 시인이 5년 만에 신작 시집을 발표했다.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는 치열한 시 정신과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돌올하다. 작가 제공 통화를 마친 뒤에도 친구의 이야기와 이로 인해 자신의 과거 모습이 바뀌어가는 묘한 경험은 “들뜬 심장의 여운”으로 길게 남았다. 친구로 인해 나의 새로운 과거를 얻었구나. 그래서 시인 백무산은 친구에게 고마움을 담은 문자를 보냈다. “네가 살아온 시간 동안 나도 그렇게/ 살아남았던 것이 고마워/ 잘 살아주어서 네가 나인 양 자랑스러워”….

친구가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은 이전에 갖고 있던 여러 생각과 더해지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과거조차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 생각을 조금 더 연장하면, 우리의 모든 기억이라거나 시간이라는 것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한 편의 시가 백무산의 가슴 속으로 몰려오는데.

“문자를 보내면서 고마운 건/ 너보다도 너로 인해 한결 괜찮아진 나였던 건/ 마치 네가 나를 대신 살아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로 인해 희미하게 알게 되네/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나를 조금씩 살아주기도 한다는 걸// 서툴고 어리석고 나를 모르는 나니까/ 어디선가 조금씩 나를 불러주고 대신 살아주어/ 간신히 내가 나로 살아 있는지도 몰라// 그뿐 아니지, 지나쳐 보던 산들과 저물녘 강과/ 새벽안개와 겨울 바다도/ 구름 속 저 달도 나를 살아주지/ 내게 없는 내 기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 때로는 비열한 자들이 나를 살아주기도 하지/ 세상을 그들이 제멋대로 끌고 가버리니까/ 조소와 냉소와 악담으로 나를 살아버리기도 하지/ 우리를 대신해서 악의적으로 살아주기도 하지”(‘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 부문)
한국 노동시의 거목 백무산 시인이 시간과 기억을 비롯한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음을 갈파한 시편 ‘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를 표제시로 최근 5년간 창작한 시 56편을 엮은 신작 시집을 발표했다. 전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2020) 이후 5년 만의 신작 시집(사진)으로, 그의 열한 번째 시집이다.

백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직설적 화법과 반어와 역설의 수사를 통해 공동체적 사유를 바탕으로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고 자본주의 문명의 실상을 통렬히 비판한다.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사회의 폐쇄회로를 꿰뚫는 통찰력,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는 치열한 시 정신,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돌올하다.

젊은 시절 ‘노동해방’의 기치를 전면에 내걸고 기성 문단을 뒤흔들었던 백 시인이 바라본 자본주의와 인간 소외의 실상은 어떤 모습일까. 폭주하는 문명을 되돌려 세울 그의 대안은 무엇일까. 작가적 여정은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백 시인을 지난해 12월24일 이메일과 전화 통화로 만났다.

―표제시 ‘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는 존재의 연결성이나 인연성을 갈파한 절창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거나 자연과 한 몸이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지요. 당위적 인식으론 행동도 바뀌지 않습니다. 존재에 대한 성찰이 보다 근원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식의 저변에서 우리는 비인간적 존재와도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요. 생각이 바뀌면 과거도 새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과거도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른다는 의식도 기계의 시간에 충실해온 습관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세계는 우리의 인식과 다르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비인간적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선 인간의 시간을 멈추어보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고요.”

시집에는 자본주의와 인간 문명을 비판하는 날 선 감각이 선연한다. 속도가 생존의 조건이 된 자본주의를 “멈추지 않아 아무나 탈 수 없”고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도 없는 기차”에 비유하기도 한다.

“달리는 기차를 본다 멈추지 않는 기차를/ 멈추지 않아 아무나 탈 수 없는 기차/ 그만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기차// 기차의 속도로 달려야만 탈 수 있다/ 내리고 싶을 때 내리는 자는 치명상을 입는다// 세워주지 않는 저 기차에 우리 모두 이미 타고 있다/ 탈 수 없는 기차를 이미 타고 있는 것은 악몽이다”(‘기차에 대하여’ 부문)
―자본주의의 속도성과 물신성을 고발한 ‘기차에 대하여’는 어떻게 태어났는지요.

“우리는 현대사회를 무한 경쟁사회라고 말하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불가피한 것인데 어쩌겠느냐는 식으로 대응하죠. 또 능력만큼 보상받는 것은 당연하고 공정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도 흔한 일이고요. 자본주의적 가치화가 전일적인 사회에서 다른 출구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죠. 우리는 매일 여러 증상에 시달리지만, 깊은 병이 있는 줄 모르고 살기도 합니다. 경제협력개발가구(OECD) 국가 가운데 매년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한다든가 고립형 은둔 청년들이 계속 늘어나고, 출산율 세계 최저를 기록하며, 하루에 7명의 노동자가 아침에 출근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멈추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체를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속도 위에서는 모든 풍경이 가상의 공간이 돼버립니다. ”

시인은 그래서 ‘멈춤의 미학’을 역설한다. 멈춰야 비로소 반성 없는 자본주의의 모순이나 문명의 세월을 돌아보고, 자연과 인간성을 되돌릴 수 있다고.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아서지/ 하늘이 푸르른 것도 별이 빛나는 것도// 꽃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도 무엇을 하지 않아서지/ 초록의 나무가 저리 빛나는 것도”(‘멈추어서 할 일들’ 부문)
1955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난 백무산은 1984년 ‘민중시’ 제1집에 ‘지옥선’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등을 창작 발표했다.

―시를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시는 ‘쓰기’와 ‘말하기’ 중간쯤이거나 말에 더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제가 쓴 시를 다시 읽지 못하는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시를 오래 다듬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즉석에서 쓰고 마는 것은 아니고, 오래 마음에 담겨져 있던 것이 밖으로 나오지만 그러고 나면 다시 읽어볼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시론을 가지고 원칙을 고집하진 않지만, 시가 머리에서 나온 것인가 몸에서 나온 것인가, 그 구분은 꼭 하려고 합니다. ”

백무산은 보통 오전 7시쯤 일어나서 밤 11시쯤 잔다. 딱히 고정된 일도 없어 간헐적으로 일할 뿐이다. 글쓰기를 위한 일정한 시간이나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통 일을 하지 않을 때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그는 몸을 쓰는 활동을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몸으로 생각한다, 는 관념은 그에겐 비유적이거나 생각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옛날에 가지 못했던 산에 다닌다든가 운동도 한다.

집을 나서도 그만이고 누워 있어도 그만. 그리하여 시인 백무산은 질주하는 자본주의와 인간 문명의 어떤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난감해하기도 할 것이고, 때론 봄날을 입고 서기도 할 것이다.

“멈추고 벗어버리고 덜어내는 특권이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능력 말이야/ 그보다 멈춘다는 걸 이해하는 능력 말이야/ 그리고 네 곁에 내가 있어주는 일이지/ 곁에 있어주는 능력 말이야”(‘곁에 있어주는 능력’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HOT 포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