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0일 베네수엘라 푸에르토 카베요에 있는 국영 석유회사 PDVSA의 엘 팔리토 정유공장 [사진=로이터연합뉴스] 1922년 12월 14일 베네수엘라 북서부 카비마스의 라 로사 마을에서 60여 m 높이로 치솟은 검은 액체는 한 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로열 더치 셸이 시추하던 로스 바로소스-2 유정에서 9일간 분출된 엄청난 양의 원유는 환경 재앙이었지만 동시에 베네수엘라가 세계 최대 석유 부국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베네수엘라 석유는 다시 한번 역사의 중심에 섰다. 이번에는 미 육군 최정예 부대 델타포스를 동원한 마두로 대통령 체포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개입은 21세기 국제질서에서 전례 없는 도박이다. 현직 국가원수를 군사작전으로 체포한 이 사건은 20세기 초 미국의 대포함 외교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과연 이 도박은 성공할 수 있을까?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의 100년 역사와 현재 상황을 들여다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야심 찬 계획이 왜 '위험한 도박'인지 명확해진다.
영광의 시대: 석유가 가져온 번영
가난한 농업국이던 베네수엘라는 1929년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석유 생산국으로 급부상했다. 스탠더드 오일, 셸, 걸프 같은 거대 석유 기업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베네수엘라는 대미 주요 석유 공급국이자 남미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로물로 베탄쿠르트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양국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베네수엘라 원유의 특별함은 그 성질에 있다. 초중질유라 불리는 베네수엘라 원유는 점성이 매우 강해 정제가 어렵지만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유가 상승과 정제 기술 발전으로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갖게 되었다. 디젤, 아스팔트, 벙커C유 같은 다양한 산업용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멕시코만의 미국 정유시설 70%는 이 중질유를 처리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1990년대 후반 베네수엘라는 하루 350만배럴을 생산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몰락의 20년: 차베스와 마두로가 남긴 폐허
1999년 우고 차베스의 집권은 모든 것을 바꿨다.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한 차베스 정권은 모든 석유 자산을 국유화하고 엑손모빌과 코노코필립스 등 외국 소유 자산을 몰수했다. 숙련된 기술자들이 베네수엘라를 대거 떠났고, 국영 석유공사 PDVSA는 군대가 장악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석유라는 자원에만 의지한 채 복지정책을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국가부채와 경제 상황이 악화됐다. 2005년 미국은 보복 조치로 베네수엘라산 석유에 제제를 가했고 양국 관계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
마두로 정권하에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014년 유가 폭락은 베네수엘라를 초인플레이션으로 몰아넣었고 780만명이 조국을 떠났다. 2019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제재로 미국에 대한 수출이 사실상 차단되면서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은 붕괴 직전까지 갔다. 파이프라인은 50년간 방치되어 기름이 새고, 정유시설은 부식되어 무너졌다. 결과는 참담했다. 3030억배럴이라는 세계 최대 확인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현재 일일 생산량은 100만배럴 아래로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0.8% 정도에 불과하다.
트럼프의 석유 제국 야심
마두로 체포 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는 '석유'라는 단어를 스무 번이나 언급했다. 베네수엘라 침공이 석유 때문이었음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석유에 집착하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미국 정유업계의 수익성 회복이다. 미국은 셰일 혁명으로 세계 1위 산유국이 되었지만 셰일 오일은 경질유라서 휘발유 생산에는 적합하지만 다른 용도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 베네수엘라 초중질유는 다양한 산업용 제품 생산이 가능하다. 게다가 미국 정유사들은 이미 베네수엘라 원유 전용 정제 설비를 보유하고 있어 신규 투자 없이 기존 시설을 활용할 수 있다. 캐나다산 중질유가 베네수엘라산 석유를 일부 대체했지만 가격이 비싸다. 게다가 트럼프의 관세 공세로 캐나다가 수출 다변화를 추진 중이라 베네수엘라 석유는 미국 정유업계에 단비와 같다.
둘째, 더 큰 그림은 국제 유가 지배권 장악이다. 북미와 남미의 석유 자원을 장악하면 미국은 사실상 국제 유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유가를 배럴당 50달러 이하로 유지하면 러시아와 이란 같은 적대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도 낮아져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도 확대할 수 있다. 지정학적 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전환점인 것이다.
재건? 극과 극으로 갈린 전망
문제는 실행 가능성이다. 트럼프는 "18개월 안에 베네수엘라 석유 인프라를 완전 재가동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전문가들의 전망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비관론의 대표 주자인 에너지 컨설팅 업체 리스타드 에너지(Rystard Energy)는 현재 생산량을 유지하는 데만 15년간 530억 달러, 전성기인 하루 300만배럴로 회복하려면 2040년까지 183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추산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트럼프의 공언을 "위대한 도박"이라고 평하며 인프라가 너무 심각하게 파괴되어 복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우드 매켄지(Wood Mackenzie)는 낙관적이다. 소규모 투자만으로 1~2년 내 하루 200만배럴까지 회복 가능하다고 본다. 유전 지도가 이미 완성되어 탐사 관련 위험이 없고, 모든 유전이 얕은 수역에 있어 채굴 비용이 저렴하다는 논리다. 같은 산업을 보면서 전문가들의 견해가 이토록 다르다는 것은 베네수엘라 유전의 실태를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방증이다.
다섯 가지 장벽
트럼프의 열정과 달리 석유업계는 무덤덤한 분위기다. 주요 외신들은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 장악 계획과 관련해 "대통령의 바람은 업계의 바람과 다르다"며 그 몇 가지 걸림돌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정치적 불확실성이다. 석유 투자는 수십 년을 내다보는 장기 프로젝트인데 몇 주 후의 베네수엘라 정세도 예측할 수 없다. 트럼프가 마두로 정권 2인자인 델시 로드리게스를 지지한 것도 불안 요소다. 민주화를 외치던 야권 지도자 마차도를 제쳐두고 독재정권 핵심 인물을 선택한 것은 트럼프가 민주주의보다 석유 사업 추진 능력을 우선시한다는 뜻이다. '온건한 독재체제'가 얼마나 안정적일지 아무도 모른다.
둘째, 천문학적 비용이다. 최소 수백억에서 최대 1830억 달러라는 추산은 2024년 미국 주요 석유회사 투자비의 두 배에 달한다. 이는 한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셋째, 유가가 너무 낮다. 배럴당 60달러 미만의 저유가 환경에서 위험한 프로젝트에 거액을 투자할 CEO는 없다. 게다가 글로벌 원유 공급은 늘고 전기차 보급으로 수요 증가는 둔화되어 유가 급등 가능성도 낮다.
넷째, 자산 압류 트라우마다. 코노코필립스는 120억 달러, 엑손모빌은 베네수엘라에서 20억 달러를 아직도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차베스 정권의 국유화로 입은 손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다섯째, 대안이 있다. 셰브론이나 엑손모빌은 인근 가이아나에서 이미 대규모 해상 유전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 굳이 위험한 베네수엘라에 뛰어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설득력 없는 논리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석유 논리가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2003년 미국은 원유 순수입국이었고 이라크는 세계 4위 석유 매장량을 보유해 나름의 경제적 논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20년 사이 석유 산업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셰일 혁명으로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되었고, 2002년 하루 6580만배럴이던 전 세계 생산량은 2024년 7660만배럴로 증가했다. 전기차 보급으로 석유 수요 증가는 둔화되고 있다. OPEC조차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유지하는 전략을 포기하고 저가 공급 전략을 고려할 정도다.
더구나 베네수엘라 원유는 황 함량이 높아 정제가 어렵고 장기 집권한 사회주의 정권 아래 인프라가 크게 붕괴된 상태이다. 이를 회복하려면 막대한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석유를 호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워싱턴포스트의 표현대로 "OPEC이 시장을 지배하고 석유가 희소 자원이었으며 주유소 앞에 긴 줄이 늘어서던 젊은 시절의 인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경고
미국의 정권 교체 개입은 단기적 성공이 장기적 실패로 이어진 사례로 가득하다. 1953년 이란, 1954년 과테말라, 1973년 칠레에 대한 개입은 수십 년간 지역 불안을 야기했다. 전문가들은 정권 교체가 목표를 달성하는 비율이 50% 정도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베네수엘라 사태는 여러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민주적 과도정부 수립이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최악에는 권력 공백으로 내전이 발생하거나 미국의 직접 통치가 장기화되며 반미 감정이 폭발할 수 있다. 쿠바, 콜롬비아, 멕시코 등 주변국에 대한 트럼프의 경고는 이미 지역 전체를 긴장시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쿠바 이민자 가정 출신인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에게 마두로 제거는 미국의 최종 목표인 쿠바 정권 교체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라고 분석했다. 석유 이익과 개인적 정치 목표가 얽힌 복잡한 구도이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 자원과 중남미 지역 지배권을 노리고 있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자유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야당 지도자들이 통치할 능력이 없다며 독재정권을 그대로 둔 채 수장만 제거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석유의 저주
1922년 라 로사에서 분출된 석유는 베네수엘라에 영광과 저주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이제 베네수엘라는 다시 한번 기로에 섰다. 하지만 트럼프의 야심 찬 계획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전문가들조차 석유 인프라 재건 비용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미국 석유회사들은 눈치를 살피며 투자를 망설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치적 불확실성은 마두로가 사라졌음에도 여전하다.
100년간 '석유의 저주'에 시달린 베네수엘라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외세 개입이라는 또 다른 저주를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명확하다. 자원만으로는 국가의 번영을 보장할 수 없으며, 외세의 개입은 단기적 이익을 위해 장기적 불안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위험한 도박이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리고 국제질서에 어떤 선례를 남길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봄은 아직도 요원하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아주경제=이수완 논설위원 alexlee@a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