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이 제아무리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 해도 어떤 현실의 사건은 능히 그것을 압도한다. 오늘날의 미국은 영화를 말하기 위해 그 현실을 끌어오는 일이 불경하게 보일 정도다. 이제 말하려는 것은 픽션을 능가하는 충격적인 현실 사건이 아니라 현실을 닮은 미국의 영화다. 알렉스 가랜드가 연출한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현대 미국 정치의 극단적 양극화 이후를 상상으로 그려낸 대체역사물이다. 정부군과 반정부군, 지역 연합과 동맹으로 나뉜 세력들은 내전을 이어간다. 이런 부류의 영화가 어떤 디테일을 아예 삭제해 버리거나 공들여 설명하지 않는 까닭은 영화 바깥의 현실이 그 역할을 대체 수행할 수 있음을 전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 종군기자 리 밀러의 이름을 떠올리도록 주문하는 주인공 리 스미스(키얼스트 던스트)는 시위대의 인파 속으로 성조기를 흔들며 뛰어든 자가 벌인 자폭 테러 현장에서 제시(케일리 스패니)와 만난다. 리는 오랜 동료 기자 조엘(와그너 모라), 존중해 마땅한 경력의 경쟁 언론사 기자 새미(스티븐 헨더슨)와 곧 축출될지도 모르는 미 대통령의 인터뷰를 담으려 워싱턴으로 향한다. 여기에 스물셋밖에 되지 않은 제시가 종군기자가 되려는 결심으로 카메라를 들고 리와 일행을 따라나선다. 목적지로 가는 길에는 내전의 참상과 갈 곳 잃은 증오, 총격전과 시체의 무덤 행렬이 이어진다. 주목할 만한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포진한다. 종군기자들이 반정부군과 함께 시가전이 벌어지는 도심을 지나 백악관으로 진입해 대통령에게로 향하기까지의 시퀀스다.
무너진 바리케이드를 넘어서는 결연한 리를 따라선 이후 제시의 카메라는 활약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비극을 목전에 두고 사진 찍을 생각조차 못했다며 울던 제시가 이제 순간을 기록하는 데 충실한 저널리스트로 거듭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기보다 제시의 카메라는 참상의 스펙터클과 공모하기 시작한 것에 가깝다. 그는 더 이상 참상을 참상으로 볼 수 없고, 죽음을 죽음으로 다루지 못하며, 눈앞의 사건은 오로지 렌즈에 담아야만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이민세관단속국의 한 시민 총격 사건은 사건을 정당방위로 축소하려던 트럼프 정부의 말에 반박하는 현장 영상이 소셜미디어와 외부 매체를 통해 알려지며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주택가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여러 목격자가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영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 보도된다. 주요 외신은 미니애폴리스 사건의 촬영 영상으로 시선을 끌어 이와 유사한 사건을 보도한다. 사안의 심각성과는 별개로 미디어는 다각도의 영상, 유사성을 연결지을 수 있는 과거를 플래시백처럼 모아서 현실을 영화처럼 다루려는 듯 보인다. 영화와 현실의 안과 밖, 이것은 모두 미국의 상상이고 미국의 현실이다. 정녕 모두 미국만의 것일까.
유선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