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도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논설고문] 2026년 새해를 맞았지만, 중소기업을 둘러싼 경영 환경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고금리는 장기화되고 있고,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산업 구조전환은 기존 사업 모델의 유효성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인력난과 자금 부담까지 겹치며 많은 중소기업들이 “지금 버티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같은 환경 속에서도 방향을 잡고 다시 성장 궤도에 오르는 기업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필자는 ‘20~‘23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으로 재임한 3년여 동안 전국의 150여 개 중소기업 현장을 직접 찾았다. 코로나19라는 극한의 위기 속에서도 성장을 이어간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현장에서 비교해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분명해진 것은, 성공 여부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규모나 업종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정리된 공통된 판단의 축은 바로 CEO·Customer·Change에 Global을 더한 ‘3C+G 법칙’이다. 이는 이론이나 슬로건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한 생존과 회복의 기준이다.
CEO: 위기일수록 대표의 판단이 기업의 생존선을 결정한다.
첫 번째 C는 ‘CEO’다. 현장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사실은, 위기 국면일수록 CEO의 역할이 더 커진다는 점이다. 위기에서 살아남은 기업의 CEO들은 공통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결정 기준과 방향을 분명히 세우는 데 집중했다. 무엇을 끝까지 지킬 것인지, 무엇은 과감히 내려놓을 것인지가 명확했다. 핵심 기술, 핵심 인력, 그리고 시장과의 신뢰가 그 기준이었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은 수차례 자금난 속에서도 연구개발 투자를 멈추지 않았고, 그 선택이 오늘날의 독보적 경쟁력을 만들었다. 국내 중소기업 중에서도 단기 실적 압박에서도 기술 축적과 인력 유지를 선택한 기업들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글로벌 틈새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했다. CEO는 관리자가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가는 개척자라는 점이 현장에서 반복해서 확인됐다.
Customer: 고객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가 기업의 체력을 만든다.
두 번째 C는 ‘Customer’, 고객이다. 많은 기업들이 매출 감소 국면에서 신규 판로 개척을 고민하지만, 실제로 살아난 기업들은 고객 수를 늘리기보다 고객과의 관계를 깊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고객의 불편함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그 해결과정을 제품과 서비스에 반영하며, 거래 관계를 구조화했다. 글로벌 기업 아마존은 고객 경험 개선을 위해 장기간 수익성을 희생했고, 그 전략이 결국 시장 지배력으로 이어졌다. 국내 중소기업 가운데서도 고객사의 운영비용과 리스크를 줄여주는 솔루션을 제공함으로써 단순 납품업체에서 전략적 파트너로 도약한 사례가 적지 않다. 성장기의 중소기업에게 고객은 매출원이 아니라 기업의 체력을 결정하는 핵심 자산이다.
Change: 변화는 위험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다.
세 번째 C는 ‘Change’, 변화와 혁신이다. 현장에서 위기를 넘지 못한 기업들의 공통점은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실행을 미뤘다는 점이 다. 반면 살아남은 기업들은 기존 성공 모델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사업 구조·주력 제품·시장 방향 중 최소 하나는 과감히 바꿨다.
노키아의 몰락은 변화에 늦은 기업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대로 국내 중소기업 중에는 기존 주력 제품을 기반으로 친환경·디지털 요소를 결합하거나, 응용 분야를 확장해 새로운 시장을 연 사례가 적지 않다. 변화는 불확실한 도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다. 기업의 성장 단계에 따라 3C의 중요성이 달라진다.
중진공의 3만여 개 평가데이터를 바탕으로 심층분석한 결과 더욱 분명해진 사실은, 3C는 모든 단계에서 중요하지만 성장 단계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창업기에는 CEO의 전문성과 결단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 시기에는 완벽한 전략보다 빠른 판단과 책임 있는 실행이 중요하다. 대표자의 경험과 문제의식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다.
그러나, 성장기에 접어들수록 무게중심은 Customer로 이동한다. 매출이 늘고 조직이 커질수록 고객 관리가 느슨해지기 쉽지만, 이 시기에 고정 고객을 확보하지 못하면 외형 성장은 쉽게 흔들린다.
도약기·성숙기 또는 위기 국면에서는 Change가 생존을 가른다. 창업 CEO는 기존 성공방식에 집착하여 안주하려 하고, 그 한순간에 시장은 빠르게 등을 돌린다. 신사업 진출, 기술 고도화 등 변화에 대한 결단이 기업의 존속을 결정한다. 다만,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꾸려 하기보다, 가장 중요한 하나를 선택해 집중한 기업들이 위기를 넘었다.
Global: 중소기업에게도 가장 현실적인 돌파구
3C를 하나로 묶는 마지막 요소는 ‘Global’이다. 내수중심 전략만으로는 성장의 한계가 분명하다. 현장에서 만난 성공 기업들은 창업초기부터 해외시장을 염두에 두고 기술과 제품을 설계했다. 글로벌 인증과 품질 기준, 해외 파트너십을 미리 준비한 기업들은 빠르게 데스밸리를 통과했다. K-중소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산업에서 입증되고 있다. 문제는 가능성이 아니라 준비를 지속할 수 있는 전략과 실행력이다. 현장에서 나온 해법만이 현장에서 작동한다.
‘3C+G 법칙’은 책상 위에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수백 차례 현장 방문, 수천 번의 기업인과의 대화, 그리고 성공과 실패 사례의 반복 비교 속에서 도출된 결과다. 정책 또한 현장을 모르면 힘을 잃는다. 중소기업의 현실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는 현장에 있는 기업인들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오늘은 수많은 중소기업이 위기를 견뎌온 결과다. 외환위기, 금융위기, 팬데믹을 지나며 산업 기반을 지켜낸 주체도 중소기업이었다. 지금의 어려움 역시 처음 겪는 위기가 아니다. 이제 대한민국 정부와 기업, 우리 모두의 과제는 분명하다. K-중소기업이 K-산업으로, K-CEO로 성장해 세계 무대에 서도록 만드는 것이다.
2026년은 결코 쉬운 해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준이 분명한 기업은 언제나 살아남았다. 현장에서 검증된 3C+G 법칙은 중소기업에게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바꿔야 하며,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현실적인 나침반이다. 지금의 어려움이 끝이 아니라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기준을 다시 세우고 한 걸음씩 실행에 나선다면, 우리 기업들은 다시 길을 만들어낼 힘이 있다. 그 힘이 모일 때, 한국 경제의 다음 성장도 다시 시작될 것이다.
김학도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 통상교섭실장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 △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현 충북대 특임교수
아주경제=김학도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