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확장재정의 대가, 세금이 아니라 물가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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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확장재정의 대가, 세금이 아니라 물가일 수 있다

확장재정은 위기 대응의 중요한 정책 수단이다. 문제는 그것이 예외적 처방이 아니라 상시적 기조, 즉 정책의 '상수'로 굳어질 때다. 최근 정부가 중기적으로 확장재정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신호를 분명히 하면서 재정 운용은 경기 대응을 넘어 정책 철학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그 재정은 어떤 방식으로 조달될 것인가.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장은 최근 학술 강연에서 세입 기반 확보 없이 지출 확대가 장기화할 경우 국민이 이른바 '인플레이션 세금'을 부담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경제학적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경로다. 물론 모든 재정 확대나 국채 발행이 곧바로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증세나 지출 조정 없이 국채 발행에 의존한 재정 확대가 지속되고 수요 압력이 예상보다 강해지거나 통화정책의 대응 여력이 제약되는 국면이 맞물릴 경우 부채의 실질 가치를 물가 상승을 통해 낮추려는 유인이 커질 수 있다. 이는 명시적 세금 인상 대신 실질 구매력 하락을 통해 부담이 이전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재정 확대가 세입 확충과 병행되면 정부 지출 증가만큼 민간의 가처분소득이 조정돼 순수요의 급격한 팽창은 제한된다. 그러나 최근 논의되는 확장재정은 지출 확대의 지속 가능성은 비교적 분명한 반면 이를 뒷받침할 중·장기 세입 기반 강화 로드맵은 뚜렷하지 않다. 이는 재정이 단기 대응을 넘어 구조적 '상수'로 고착화될 위험을 시사한다.


이 과정에서 통화정책의 운신 폭이 좁아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재정이 부채에 크게 의존할수록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뿐 아니라 국채 시장과 정부의 이자 부담을 함께 의식해야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금리 인상이 정부 재정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통화정책 결정에는 정치적 부담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구조가 지속되면 물가 안정을 위한 통화정책이 제약을 받거나, 그렇게 인식될 위험이 커진다. 이론적으로는 이른바 '재정 지배(fiscal dominance)'로 이어질 수 있는 경로다.


거시 환경 역시 우호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환율 변동성이 큰 상황에서 환율은 수입물가를 통해 물가 기대를 자극할 여지를 키우고 있다. 여기에 확장재정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정책 신호까지 더해지면 시장은 물가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기대 인플레이션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실제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정책 비용은 훨씬 커진다. 중앙은행이 가장 경계하는 국면이다.


확장재정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경기 하강 국면에서 정부의 적극적 역할은 필요하다. 그러나 확장재정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정상화될지에 대한 신뢰 가능한 경로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그 비용은 결국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증세나 지출 조정이라는 명시적 방식이 아니라 물가 상승이라는 보다 불투명한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재정의 급격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재정의 규율이다. 실질적 구속력을 갖춘 재정준칙, 중기재정계획의 신뢰성 제고, 예산 총량에 대한 사전적 검증 장치 없이는 확장재정은 쉽게 정치화되고 한 번 커진 재정은 되돌리기 어려운 상태로 굳어질 수 있다. 확장재정의 효과는 현재의 선택이지만 그 비용은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 그리고 그 부담이 어떤 형태로 귀결될지는 지금 재정 운용이 어떤 규율 위에 서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선애 경제금융부장 ls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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