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평균 원·달러 환율이 1422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연평균으로 사상 첫 1400원대 기록으로, 외환위기(1395원)와 글로벌 금융위기(1276원)를 모두 넘어선다. 지난해 원화가치는 유로·파운드·위안·엔 등 다른 통화가치와 비교해 하락폭이 두드러지며 글로벌 최약체로 평가받았다. 추락하는 원화가치를 두고 과거처럼 한국경제에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실제 위기의 징후가 있는가를 보면 그렇지 않다. 환율 방어용 실탄인 외환보유액(4306억달러)은 국제통화기금(IMF) 권고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탄탄하다. 외환보유액과 비슷하게 환율방어에 도움이 되는 순대외금융자산도 1조달러 이상의 흑자기조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위기 때와 다르다. 단기 외채 비율도 35% 안팎으로 낮고,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21.90bp)도 안정적인 수준이다. 지표만 놓고 보면 과거처럼 외채를 못 갚아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렇다면 왜.
미국 재무부가 발표한 지난해 미국 주식시장 자금 유입 규모 국가별 순위에서 조세피난처인 캐리비안·케이먼·아일랜드를 제외하고 한국(순유입액 532억달러, 1~9월 기준)이 1위에 올랐다. 경제규모가 2~3배 큰 일본(283억달러)이나 싱가포르(489억달러)도 제쳤다.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가 크게 늘어난 결과다. 국내 증시가 코스피 5000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 자산 투자를 비관하고 해외로 나가는 게 맞는 방향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국가경제의 기초체력인 환율은 양국의 경제 여건을 그대로 반영한다. 내수 불안과 집값 폭등,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구조적 위기로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1%대로 주저앉았다. 반면 경제규모가 17배 큰 미국은 매년 2% 이상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 금리차 역전 현상도 41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확장재정까지 맞물렸다. 인공지능(AI) 산업 팽창기 미래의 오픈AI, 엔비디아를 노리는 유망 AI 기업들은 미국에 몰려있다. 시장에 돈은 계속 풀리는데 경기는 하강하고 국내 자산에 대한 기대수익도 낮은 상황이라면, 유동자금은 계속해서 미국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매년 1000억달러 이상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는 수출기업들은 벌어들인 달러를 쌓아만 놓고 환전해 시장에 풀지 않는다. 미국발 보호무역주의와 전세계적인 자국 우선주의에 대응해 해외직접투자를 어마어마하게 늘리고 있다. 미국 등지로 해외 생산 거점을 옮기면서 외국에서 번 돈을 국내로 들여오지 않고 있고, 관세 협상에 따라 10년간 매년 200억달러를 미국으로 내보내야 한다. 시중에는 개인·기업·기관의 달러 수요가 동시에 몰리는 구조적인 수급 불균형에 원화가치가 크게 흔들릴 거란 예측이 퍼져 있다.
이 같은 구조적 자본 이동은 세금 일시 감면이나 국민연금 환헤지 동원 같은 임시방편적 단기처방으로는 막지 못한다. 고환율 기대와 달러 선호로 국내 자금 유출이 빨라지고 해외에서 번 돈이 국내에 환류가 안 되는 구조가 심화하면서 한국경제가 수출 호황·내수기반 붕괴의 '대만형 불황'에 진입하고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결국 미국으로 향한 투자 발길을 돌려세울 수 있는건 우리 기업과 경제에 대한 신뢰 회복이다.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를 풀고 수출 증가가 국내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장기적인 대책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세종=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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