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사에 다시는 반복되기 어려운 숫자가 새겨졌다. 이창호 9단이 통산 1,969승으로 역대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며 2025 바둑대상 특별기록상의 주인공이 됐다. 연말 송년 시상식의 진정한 스포트라이트는 ‘현재의 승자’가 아니라 시간을 이긴 승부사에게로 향했다.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사옥에서 열린 ‘2025 바둑대상 시상식’. 이창호는 조용히 단상에 올랐다. 박수는 컸지만 표정은 늘 그랬듯 담담했다. 승부의 환희보다 축적의 무게를 아는 국수의 얼굴이었다.
1,969승. 이 숫자는 단순한 누적이 아니다. 한국 바둑이 프로화·국제화·세대교체를 거치는 동안, 한 선수가 끝내 경쟁력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특별기록상을 시상한 곽영길 한국기원 이사(아주경제신문 회장)는"이창호국수의 쾌거는 AI시대에 모든 분야 프로들의 전범"이라면서 역경(주역)에서 말하는 '자강불식 후덕재물'의 실행자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번 바둑대상은 신진서 9단의 6년 연속 남자 MVP, 김은지 9단의 첫 여자 MVP라는 화려한 헤드라인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송년의 맨 앞줄을 차지한 것은 ‘기록’이었다. 한국기원은 이창호의 최다승을 특별기록상으로 분리해 호명하며, 한 해의 성과를 넘어 한 시대의 축적을 기리는 시상식의 톤을 분명히 했다.
이창호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바둑의 지형을 바꿨다. 압도적 기세 대신 계산과 인내, 실수 없는 끝내기로 승부의 기준을 재정의했다. ‘돌부처’라는 별명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선택의 다른 이름이었다.
인공지능 등장 이후 바둑의 문법이 급변했지만 그는 퇴장하지 않았다. 변화에 적응했고, 현역으로 남아 승수를 쌓았다.
1,969승은 그래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기록’이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세대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경쟁력을 유지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며 “이창호의 기록은 단순한 최다승을 넘어 프로 바둑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기실, 최다승이라는 숫자 뒤에 남은 가치는 세 가지다.
첫째, 지속성이다. 바둑은 체력·집중력·연구 환경이 동시에 요구되는 종목이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승수를 더했다는 사실 자체가 프로 시스템의 이상적 모델을 보여준다.
둘째, 적응력이다. 인공지능 이후 바둑은 수 읽기의 방향과 가치 판단이 달라졌다. 이창호는 자신의 장점을 버리지 않되, 새로운 흐름을 흡수했다.
셋째, 표준의 창출이다. ‘안정적 승부’는 한때 보수로 오해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리스크 관리의 교본이 됐다. 그의 바둑은 여전히 연구 대상이다.
이창호 국수를 포함한 최다승 TOP5를 통해 한국 바둑의 계보와 변화를 살펴보는 것 또한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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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이창호 9단: 1,969승 — 전 시대를 관통한 절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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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조훈현 9단: 공격과 승부사의 원형, 스승이자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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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이세돌 9단: 창조적 파괴, 인간 바둑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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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박정환 9단: 장기 집권과 국제 경쟁력의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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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유창혁 9단: 예술적 공격과 전성기의 미학
이 순위는 단순한 줄 세우기가 아니다. 한국 바둑이 공격—안정—창조—균형이라는 서로 다른 미학을 어떻게 축적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연대기다.
올해 시상식은 남녀 MVP를 분리하고 부문을 대폭 확대한 첫해였다. 신진서의 장기 집권은 한국 바둑의 현재 경쟁력을 증명했고, 김은지의 부상은 여자 바둑의 지형 변화를 알렸다.
그러나 이 모든 현재형 성취의 바닥에는 이창호가 만든 표준이 놓여 있다.
연구의 태도, 승부의 절제, 현역의 지속성—이 세 가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 바둑의 미래는 두 갈래다. 하나는 최상위의 세계 경쟁력 유지다. 신진서를 중심으로 한 정예 시스템이 요구된다. 다른 하나는 저변과 시간의 축적이다. 최다승의 가치는 단번의 우승이 아니라, 오래 버티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창호의 기록은 다음 세대에게 묻는다.
“얼마나 빨리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이길 것인가”**를.
송년의 바둑대상은 그래서 한 해의 결산이자 한 시대의 복기였다. 트로피는 여러 명에게 돌아갔지만, 기록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남았다.
이창호 1,969승.
한국 바둑이 쌓아온 시간의 총합이자,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그래픽=노트북LM] 아주경제=아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