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스스로를 지키는 사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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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스스로를 지키는 사법부
김광중 법무법인 클래스 한결 변호사 사진법무법인 클래스 한결김광중 법무법인 클라스 한결 변호사 [사진=법무법인 클라스 한결]
5년 전 있었던 일이다. 소송 상대방 대리인으로 자주 만났던 어느 대형 법무법인의 저명한 변호사한테서 연락이 왔다. 1심에서 패소한 소송의 항고심을 같이 수행하자는 제안이었다. 사건은 재벌 계열사 간에 발생한 약 150억원대 주식매수가액 분쟁이었다. 주식 가치 평가에 관한 여러 방법론이나 그동안 법원 판단 사례들에 비추어 보면 1심 결정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1심에서 주장되지 않은 사실관계와 논리도 있어 항고심에서 충분히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사건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상대방 대리인으로 만났던 변호사가 의뢰인이 된다는 것은 변호사에게 더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1심을 대리했던 대형 법무법인의 변호사들이 먼저 그 판단의 부당함을 다투는 항고이유서를 항고심 법원에 제출했다. 기존에 주장한 논리들 중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이었다. 필자는 1심 재판부 판단을 뒤집기 위해 새로운 사실관계와 논리가 필요하다고 보아 이를 정리한 항고이유서 2건을 제출했다. 그렇게 3건의 항고이유서가 법원에 제출되었다. 주식매수가액결정 재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두 법무법인의 역량을 모아 1심 판단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그동안 수행한 다른 사건들의 결과나 기존 대법원 판단에 비추어 보아도 항고심 판단은 다를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항고이유서가 제출되면 법원은 이를 상대방에게 보내고, 상대방은 다시 항고이유에 대해 반박하는 서면을 법원에 제출한다. 서면으로 항고이유 공방을 하면 법원은 양쪽 주장을 직접 듣기 위해 법정에서 심문기일을 연다. 코로나가 한창인 때였지만 법원의 재판은 정상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그렇게 상대방의 서면과 법원의 심문기일 지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 서면이 제출되지 않았고 심문기일도 열리지 않았는데 항고를 모두 기각하는 항고심 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이유는 1심 판단이 타당하므로 1심 결정의 이유를 그대로 인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신청인은 구체적인 항고이유가 담긴 서면을 제출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항고이유서를 3건이나 제출했는데도 항고이유가 담긴 서면을 제출하지 않았다면서 항고를 기각한 것이었다. 약 150억원이 걸린 사건의 항고를 기각하면서 나온 이유는 그것이 전부였다.

심문기일도 열지 않고 상대방의 서면도 제출되기 전에 항고를 기각했으니 항고심 재판부 3명 모두 항고이유서가 제출된 사실도 모르고 이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결정을 했음이 분명했다. 필자는 물론 공동으로 소송을 수행한 변호사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8일 후 항고심 법원은 기존의 결정에서 "현재까지 신청인은 구체적인 항고이유가 담긴 서면을 제출하지 아니하였다"는 문구만 삭제하는 경정결정을 했다. 항고이유서도 읽지 않고 결정을 한 잘못을 그렇게 덮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수십 년 경력의 담당변호사들은 물론 그 어떤 변호사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당사자로서는 더더욱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자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재항고를 했으니 대법원이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이라 믿고 그 판단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10개월 만에 나온 대법원 결정은 단순한 재항고기각이었다. 항고심 법원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재벌 계열사였던 당사자 회사 대표이사는 끝내 이 사건을 언론에 알리지 못하고 억울함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이 사건의 주심 대법관은 지금 법원행정처장이다.

요즈음 사법부 개혁 공방에서 대법원은 국민 기본권과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사법부 독립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에게 비친 사법부의 모습은 우선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었다.
아주경제=양보연 기자 byeony@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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