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ㅣ김기원기자]아이가 아픈 밤에 갈 곳이 없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지역민들이 행동에 나섰다. 한 부모의 고민이 연대로 번지며 지역 소아 진료 환경 개선을 향한 첫걸음이 시작됐다.
지난 추석 무렵, 김동일 씨(강릉에이엠브레드 대표)는 갑자기 열이 오른 아이를 들쳐 안고 갈 수 있는 병원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야 했다. 그는 “언제까지 이 지역에서 아이 아픈 밤을 운에 맡겨야 하나”는 질문을 품게 됐다.
김 씨는 본인의 고민을 주변 친구들에게 전했고, 이에 동감하는 10명이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모였다.
아이를 사랑하고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지역민인 △건도리횟집 신건혁 대표 △강릉에이엠브레드 김동일 대표 △경포동해횟집 최항석 대표 △법무법인소울 이현우 변호사 △세인트존스호텔 김헌성 대표 △강릉한우금송아지 이동현 대표 △평창잣농원영농조합법인 권영만 대표 △강릉닭강정 정소미 대표 △강릉조은이플란트치과 이호찬 원장 △주식회사 알 정선환 대표가 그들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이들을 금세 하나로 묶었다. 야간 소아진료 공백, 휴일 진료의 어려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의 부족 등 영동지역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한 현실이었다.
신건혁 씨(건도리횟집 대표)는 “누군가는 이 문제를 이야기해야 했고, 또 누군가는 움직여야 했다”며, “그 ‘누군가’를 우리가 하자고 마음을 모았다”고 말했다.
◇ 영동권 소아진료의 구조적 한계… “강릉아산병원에 우리 아이의 생명이 달려있다”
영동지역의 소아진료는 오래전부터 취약했다.
지역 내 곳곳에 병원이 있지만, 야간과 휴일에도 안정적으로 소아환자를 받을 수 있는 기관은 사실상 손에 꼽힌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이어진 의정갈등의 여파는 지역 의료 인력의 수도권 쏠림을 더욱 가속화시키며 소아진료 공백을 키웠다.
여기에 저출산과 고령화, 지역 인구 감소가 겹치면서 소아진료의 운영 기반은 더욱 약해졌다. 아이 수는 줄어드는데 의료 인력 유입은 감소하고, 고령층 진료 수요만 늘어나는 인구 구조 속에서 지역 병ㆍ의원들은 소아과 진료 기능을 꾸준히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 악순환은 결국 영동권역 전체의 소아진료 부담을 강원ㆍ영동권 유일 상급종합병원인 강릉아산병원으로 몰아가는 구조를 고착시켰다.
강릉아산병원은 오랜 기간 중증·응급 소아환자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치료해 온 사실상 ‘마지막 거점 병원’이지만, 영동권역의 소아진료 부담이 한 병원에 집중되는 현실은 병원에게도, 지역 주민에게도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이러한 구조는 그대로 아이들의 골든타임과 직결됐고, 부모들의 불안은 날이 갈수록 커져 왔다.
신건혁 씨 등 10명은 이 문제를 ‘병원의 책임’이 아닌, 지역 전체가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로 바라봤다. 따라서 해결 역시 병원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지역민이 함께 나서야 한다는 결론에 닿았다.
◇ 부모들이 직접 만드는 우리 지역 소아진료 환경… ‘HB1985’의 탄생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작한 것이 소아진료 지원 시민 참여형 후원 캠페인인 ‘HB1985’다.
HB(Human Blooming)는 ‘생명을 피우는 마음’을 뜻하고, 1985는 캠페인을 제안한 신건혁 씨와 함께 뜻을 모은 친구들의 출생연도에서 가져왔다.
병원이 감당해 온 소아진료의 부담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은, 지역과 병원이 함께 지속 가능한 진료 환경을 만들기 위해 캠페인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HB1985는 14일 강릉아산병원 중강당에서 총 1억 5백만 원의 기부금을 전달했으며, 병원은 이를 소아진료 인력 확충과 시스템 개선, 응급·야간 진료 대응력 강화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기부금 전달식에서 신건혁 씨(HB1985 사무총장)는 “우리가 하는 일은 거창한 게 아닌, 내 아이가 아플 때 ‘갈 곳이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 남이 아닌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다”며, “이 지역은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곳이다”고 말했다.
◇ 소수를 넘어 지역 전체로… “우리 아이들의 내일이 달라질 것”
앞으로 HB1985 구성원들은 캠페인의 취지를 널리 알려 많은 지역민의 참여를 이끎으로써, 강릉아산병원 의료진과 함께 밤과 휴일에도 아이들이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이들은 모두 “아직 출발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움직임은 단순히 병원에 힘을 보태는 차원을 넘어, 지역 전체의 소아진료 생태계를 함께 구축하는 과정이라는 인식에서다.
이 같은 기반이 마련돼야 여행객 역시 위급 상황에서도 안심할 수 있고, 강릉이 아이와 함께 머물 수 있는 도시로 신뢰를 쌓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나아가 이 노력은 강릉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관광도시로서의 신뢰를 높이는 데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현우 씨(법무법인 소울 변호사)는 “부모가 만든 첫걸음이지만, 지역을 지키는 힘은 결국 지역민에게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최항석 씨(경포동해횟집 대표)는 “부모로서 느낀 불안, 그 감정이 10명을 움직였고 이제는 지역을 움직이기 시작했다”며,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이곳의 내일을, 우리가 직접 밝힐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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