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동안 기다려야 했다.
거울의 바다가 갈라져 내면의 거대한 크리스탈에 발을 디딜 때까지.
-파울 첼란-
고통의 절대(絶對)
‘아름다움(美)’은 언어를 절대적 고통에 맞붙인다. 한 철학자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uber muss man schweigen,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1921)고 했지만, 인간은 이 금언(禁言)을 부단히 어겨왔다. 시를 짓고 소설을 쓰는 것으로 고통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자기의 고통이든 타자의 고통이든. ‘고통스럽다’는 말 안에 담길 수 있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게 고통과 대결코자 한 언어는 고통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부딪히고 깨어져 산산조각으로 흩어진다.
그림-조미형 작가 이 불가능한 운명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끝끝내 고통에 다가가려는 문학이 있다. 거기서 언어는 처참한 잔해의 조각이 된다. 하지만 거기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깨어진 거울이 사방으로 빛을 발산하는 ‘크리스탈’이 되는 것처럼. 반짝이는 수정은 일견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날카로운 ‘칼날’이 되기도 한다. 살짝이라도 스치면 깊숙한 파열을 남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그 문학은 고통의 심연으로 발을 내디딘다. 김숨의 장편소설 ‘간단후쿠’(민음사, 2025)를 이야기할 것이다. ‘간단후쿠’는 작가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난 지 꼭 10년이 됐을 때 탈고된 작품이다. 앞서 그의 소설 다섯 편을 엮어 분석한 한 논자의 표현을 빌리면 김숨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를 초과하는” 동시에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 자체를 상실한 딜레마적인 사건”(우미영, 2023)이다. ‘간단후쿠’ 작가의 말에서 김숨은 “10년이라는 ‘붙듦’을 하고 나서야, 체화가 돼 온전한 내 이야기로 들어왔다”(289쪽)고 썼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지극한 ‘몸’의 이야기다. 인간성이 말살된 전쟁터에 끌려간 소녀들의 몸은 찢어지고 부서지고 폐허가 됐다. 쪼개진 영혼은 그럼에도 몸을 붙잡고 있다. 아주 고통스럽게. 김숨의 소설은 질문하고 있다. 문학은 고통을 재현할 수 있는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에 가까이 갈 수나 있는 것인지. 유구하게 제기됐지만, 좀처럼 대답할 수 없었던 그 물음을.
김숨의 소설로 들어가기 전 잠시 들러야 할 거대한 성(城)이 있다. 바로 파울 첼란이다. 언어와 고통 사이에 놓인 여러 비밀을 푸는 열쇠는 이 유대계 루마니아 출신 시인에게 있다. 첼란은 고통을 부단히 언어화했다. 그것도 자신의 부모를 살해했던 민족의 언어인 독일어로 거대한 고통과 마주했다. 고통을 준 언어로 고통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몸을 짓밟으라는 명령이 담긴 언어로 그것을 되돌려준다는 것은 무엇일까. 훗날 아도르노가 수정했지만(‘부정변증법’, 1966) 유럽 문단에서 이른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첼란을 통과해야 했다. 절대적인 고통 앞에서도 일본어로 ‘이타이(아프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김숨의 소설 속 소녀들을 만약 첼란이 알았다면 그 역시 아마 깊이 아파했으리라.
비약(飛躍)의 리듬
제사에 인용한 문장은 첼란의 산문 「에드가르 즈네와 꿈들의 꿈」(1948)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첼란은 자신과 교류했던 화가 에드가르 즈네의 그림을 평하면서 자신의 시론(詩論)을 벼리고 있다. ‘거울의 바다’로 옮겨진 명사의 독일어 원어는 ‘해수면(Meeresspiegel)’이다. 해수면이라는 단어 자체가 ‘바다(Meer)’와 ‘거울(Spiegel)’의 합성어다. 첼란은 이 단어의 절묘한 결합에서 ‘크리스탈(Krystal)’로 나아간다. 이 단어를 일반적으로 ‘해수면’으로 번역하면 그것은 수면이 ‘갈라지는(Zersprang)’ 것이고 그 갈라진 틈에서 내면세계의 정수(精髓)가 빛을 비추는 걸로 읽힌다. 그러나 이것을 ‘거울 같은 바다’로 번역한 허수경(파울 첼란 전집 3권, 문학동네)은 주어를 ‘거울(Spiegel)’로 봤다. 거울은 ‘깨지는(Zersprang)’ 것이고 그때 크리스탈은 거울의 파편처럼 보인다. 그럴 때 ‘발을 디딘다(betreten)’의 의미가 조금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깨진 수정의 파편을 맨발로 지르밟는 것. 고통을 몸으로 체화하는 것이다. 둘 중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첼란이라면 아마 두 방향을 모두 의도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고심 끝에 바다와 거울의 합성어인 ‘해수면’이라는 단어를 찾은 것 아니었을까. 시인 첼란의 산문은 산문조차도 시다. 반대로 소설가 김숨의 소설은 소설조차도 시다.
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
아니다. 내가 간단후쿠를 입는 것이 아니라 간단후쿠가 나를 입는 것이다. 간단후쿠를 입는 것은 간단후쿠로 되돌아가는 것이니까.
…
군인들을 데리고 자는 동안 내 몸은 간단후쿠 안에서 휘어지고, 뒤집히고, 눌리고, 부서지고 쪼개진다. 어깨, 젖가슴, 배, 팔, 허리, 엉덩이, 다리가 간단후쿠 안에서 토막 난 물고기처럼 뒤죽박죽이 돼 어지럽게 허우적거린다. 뼈들은 번개가 돼 서로를 때리며 바닥 없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간단후쿠 안에는 몸짓이랄 게 없다. 군인들이 가고 날이 밝으면 간단후쿠는 놋대야에 매달려 강을 찾아간다. (7~10쪽)
‘간단후쿠’는 일본군 위안소에서 소녀들이 입은 간단한 원피스 형태의 옷을 말한다. 소녀들은 간단후쿠가 된다. 소녀들의 몸을 두르는 천은 한없이 얇고 팔랑거린다. 아니, 그 안에 있는 것을 과연 ‘몸’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할까. 소녀들은 간단후쿠가 되어버렸으니까.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몸짓’이라고 부르는 것은 슬프게도,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어깨, 젖가슴, 팔…. 한때 인간이었던 소녀의 몸에 붙어서 소녀를 인간이게끔 했던 것들. 지금은 그저 ‘토막 난 물고기’일 뿐이다. 간단후쿠는 어떤 ‘장소’처럼 보인다. 그곳에서는 몸이 ‘몸 아닌 것’으로 변모한다.
몸이 물건(간단후쿠)이 되고, 물건이 장소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톺아보기 위해 여기에 한 프랑스 철학자의 문장을 불러와 본다. 장뤼크 낭시가 1992년 쓴 ‘코르푸스’의 한국어판(김예령 역·2012) 부제는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다. 낭시도 몸을 장소로 보고 있다. 다만 그곳은 ‘멀고도 가깝다’는 역설로만 설명될 수 있다. 낭시는 몸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단 하나라고 강조한다. “어떻게 해서 나는 ‘거기’일 수 있는가?” 김숨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했을 때, 나아가 그들의 몸을 소설로 쓰겠다고 했을 때도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다. 소설을 쓰는 나(김숨)는 ‘요코’를 비롯하여 소설 속 소녀들의 몸, 즉 ‘거기’가 될 수 있는가. 충분히 ‘거기’가 될 수 있는가.
‘간단후쿠’ 출간 직후 김숨은 한 인터뷰에서 “몸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는 모순의 장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소녀들의 몸으로 들어가, 소녀들의 몸이 되는 것은 김숨의 불가능한 욕망이다. “몸은 물질적이다. 몸은 밀도를 지니며 침범할 수 없다. 만약 몸 안에 침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몸을 분해하고 꿰뚫고 찢는 것이다. ”(‘코르푸스’) 낭시는 경고한다. 소녀들의 몸으로 들어가려는 김숨의 시도는 결국 그 몸을 나름대로 해체하려는 시도다. 그렇게 꿰뚫어 찢어진 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 그래서인지 소설의 문장은 대단히 시적(詩的)이다. ‘시적인 것’에 관해 방대한 논의가 있지만, 짧디짧은 이 글은 하나의 입장을 선택할 것이다. 토막 난 문장은 곧 토막 난 몸의 은유다. 반복을 통해 모종의 리듬이 탑재된다. 문장과 문장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하지만 그 사이 공간은 대단히 심원하다. 그것이 바로 고통의 크기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커다란 침묵이 있다. 그 심연은 어떤 언어로도 메워질 수 없다. 그저 뛰어넘을 뿐이다. 고통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간단후쿠’는 그래서 시적이다. 소설이지만 시의 언어가 필요하다. 시어의 리듬이 아니고서는 소녀들의 고통을 말하는 건 아마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즈랑은 바늘 공장이다.
스즈랑은 실 공장이다.
스즈랑은 비단 공장이다.
스즈랑은 신발 공장이다.
스즈랑은 군복 만드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돈 많이 버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좋은 공장이다.
스즈랑은 간호사 양성소다. (58쪽)
‘스즈랑’은 소녀들의 몸이 날마다 훼손됐던 위안소의 이름이다. 일본어로 ‘은방울꽃’을 의미한다고 한다.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 은방울꽃(스즈랑)의 꽃말이다. 누구의 행복인가. 이미 간단후쿠가 돼 버린 소녀들의 행복인가, 아니면 이곳에 들른 군인들의 행복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제국의 행복인가. 소녀들은 ‘틀림없이’ 행복해지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바늘 만드는 공장인 줄 알고, 실 만드는 공장인 줄 알고, 비단 만드는 공장인 줄 알고. 그저 돈 많이 벌 수 있을 줄 알고. 언젠가는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는 욕망. 스즈랑은 그런 곳이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위안소와 ‘좋은 공장’ 사이의 차이는 산문의 언어로 채워질 수 없다. 시로 넘어야 한다. 참담한 슬픔으로 비약해야 한다.
뻐꾸기의 희망, 고라니의 슬픔
군인을 데리고 자는 공장에서 여자애들이 군인들과 돌림노래를 부르며 만드는 것은 울부짖음, 짧은 비명, 긴 비명, 움츠린 말, 뭉개진 말, 깨진 말, 애걸복걸, 탄식, 한숨, 한탄, 이타이 이타이, 아리가토고자이마스다. (65쪽)
고통 앞에서 쪼개지는 것은 영혼뿐만이 아니다. 언어도 쪼개진다. ‘울부짖음’도, ‘아리가토고자이마스’도 그 어떤 소리도 소녀들의 고통을 담지 못한다. “삿쿠(콘돔)를 쓰지 않고 우리 몸에 들어오려는 군인들”(28쪽)에게 소녀들은 욕도 하고 울거나 발버둥도 쳐본다. 하지만 군홧발에 짓이겨질 수밖에 없다. 소녀들은 그저 “아리가토, 아리가토, 아리가토”(28쪽) 한다. 언어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 비트겐슈타인, 앞의 책)라던 한 철학자의 말을 떠올려 본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에게 그저 ‘감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소녀들의 언어, 즉 세계는 어떤 곳인가. 그저 ‘뒤틀리고 왜곡됐다’고 설명하면 그것으로 전부인 걸까. 아니, 이미 물화(物化)한 소녀들에게 세계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저것을 언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레이코 언니가 몸을 흐느적거리며 “뻐꾹, 뻐꾹.” 딸꾹질을 한다.
“뻐꾹 나 뻐꾹뻐꾹 고향에 뻐꾹 보내 줘 뻐꾹뻐꾹.”
…
“뻐꾹 뻐꾹뻐꾹 뻐꾹뻐꾹뻐꾹뻐꾹뻐꾹.”
레이코 언니의 딸꾹질은 멈추지 않는다.
만주에는 뻐꾸기가 없다. 레이코 언니의 몸속에는 뻐꾸기가 있다. 그녀의 몸속에 있는 뻐꾸기는 그녀가 술만 마시면 운다. 고향에 가고 싶은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 몸속의 뻐꾸기다. (152~155쪽)
언어가 불가능해진 곳에서 소녀들은 새의 말을 한다. ‘뻐꾸기’가 되어 ‘뻐꾹뻐꾹’하고 운다.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아리가토고자이마스’와는 다르다. ‘뻐꾹뻐꾹’이야말로 소녀들에게 더 큰 의미의 언어다. 만주에는 뻐꾸기가 없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뻐꾸기가 된다는 것. 새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하기(Doing Bird)’의 시를 펼쳤던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을 해설한 이광호는 이렇게 정리한다. “새가 된다는 것은 새의 형상을 닮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동물과 여성과 분자 같은 것들이 서로 구분될 수 없는 분화되지도 않은 잠재성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새하기와 작별의 리듬」, 2019) 이 말을 더 이어서 쓴다면, 레이코의 ‘뻐꾹뻐꾹’은 잠재성에의 갈망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자 스즈랑의 꽃말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뻐꾸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기도 한데, 그것은 곧 딸꾹질을 뻐꾸기의 울음으로 읽어낸 소설의 화자 요코의 간곡한 소망이기도 하다.
전생을 보여 주는 책이라고 했어. 할아버지가 책을 펼치더니 그림 하나를 내게 보여 줬어. 고라니가 배에 화살 세 개를 맞고 피를 흘리며 눈밭 위에 쓰러져 있었어. 털모자를 쓰고 털옷을 입고 화살을 손에 든 사냥꾼이 그림 귀퉁이에 서 있고. 내가 고라니한테서 눈을 못 떼자 할아버지가 그랬어. 내가 전생에 사냥꾼이었는데 새끼를 가진 고라니를 죽였다고.
…
전생의 죗값을 치르느라 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덜 억울하더라. 죗값을 얼마나 더 치러야 할까. 죽을 때까지 치러야 하는 건 아니겠지.(167~168쪽)
차라리 완벽한 물건이 됐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소녀들은 결국 자신들의 죄(罪)를 설명할 체계를 동원한다. 이 가혹한 운명을 나름대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소녀들은 자신의 전생을 제멋대로 설정한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레이코는 자신이 전생에 고라니를 죽인 사냥꾼으로 생각한다. 그는 그러면서 “뱃속에 새끼를 가진 고라니인 줄 알았으면 안 죽였을 거야”(168쪽)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이를 듣는 요코는 그것을 부정한다.
아니요. 언니는 새끼를 밴 고라니였어요. 시든 풀 한 포기 안 보이는 눈밭에서 먹을 걸 찾아 헤매다 사냥꾼을 만났어요. … 언니는 죽지 않았어요. 언니의 뱃속 아기도 죽지 않았어요. 언니는 굴속에 있어요. 날이 어두워지고, 사냥꾼이 지쳐서 산을 내려갈 때까지 언니는 굴에서 나오지 않을 거예요. 언니는 굴속에서 새끼를 낳을 거예요.(253쪽)
요코는 레이코의 전생을 다시 확신한다. 요코의 재해석에는 희망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부질없는 희망만으로는 지금 내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소녀들의 자의식은 이처럼 불안하다. 레이코의 정당화(그것은 곧 절망이다)와 요코의 재해석(그것은 곧 희망이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소녀들의 의식은 분열된다.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에는 부처의 전생 중 하나가 새끼를 밴 암사슴을 대신해 죽고자 한 ‘사슴왕’이었다는 이야기가 담겼다. 그러나 현생에도, 어쩌면 전생에도 레이코를 살펴 줄 존재는 없었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고통만 끝없이 반복된다.
죄(罪)는 인간과 관련한 것이다. 덴마크의 한 철학자(키르케고르)가 날카롭게 논의한바, 무(無)로부터 죄를 향한 공포와 불안이 야기된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정신’의 소산이다. 그는 “동물에게서는 불안을 찾아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동물은 그의 자연성에 있어서 정신으로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불안의 개념’, 1844, 임춘갑 역)이라고 강조한다. 동물은 불안하지 않다. 새끼를 밴 채 죽음을 맞이하는 어미 고라니에게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레이코의 불안이다. 그것이 죽지 않았다고 재해석한 것 역시 요코의 불안에서 비롯된다. 소녀들은 온전히 몸을 버릴 수 없었다. 소녀들의 불안과 슬픔은 소녀들에게 곧 정신이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인간으로서 몸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결코 ‘간단후쿠’ 따위의 물건이 아니었다. 첼란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들어보자. “신체로 있다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유지한다는 것이고, 자기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 1961, 김도형·문성원·송영창 역) 아무리 물건이 되고자 해도 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의 슬픔. 도저히 물화할 수 없는 몸의 아이러니.
몸의 안, 자본의 밖
몸은 또 하나의 가시철조망 울타리다.
몸은 보따리이기도 하다. 몸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 만주에, 스즈랑에 있는 것이다. 몸이 여기, 만주에, 스즈랑에 있으니까. 몸이 가면 나도 간다. 몸이 트럭으로, 기차로 던져지면 나도 함께 던져진다.
…
몸이 없으면, 그래서 입이 없으면, 배고픈 것도 모르겠지.
몸이 없으면, 그래서 얼굴이 없으면, 내 얼굴이 엄마 얼굴보다 늙은 것도 모르겠지.
몸이 없으면, 간단후쿠를 입지 않아도 되고 군인들을 데리고 자지 않아도 될 텐데.
몸이 없으면, 트럭으로 기차로 날 던지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몸이 없으면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몸 없이 집에 어찌어찌 돌아간다 해도, 내가 돌아온 걸 엄마나 동생들이 모른다. (116~122쪽)
없애고 싶은 몸,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몸. 이 몸으로 끊임없이 군인들이 다녀간다. 몸을 위해 소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에 다녀가는 군인의 개수를 세”거나, “삿쿠를 껴요”라고 말하거나, “군표를 내요”라고 하는 것뿐이다. 몸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선택지는 없다. 전쟁을 자본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할 때, 자본을 비판하는 낭시의 문장은 또다시 김숨의 소설과 공명한다.
“자본이란 이것이다. 몸이 상품화되고, 수송되고, 이동되고, 재배치되고, 대치되고, 하나의 자리와 자세에 처하는 그 과정을 마모될 때까지, 결국 실업의 상태에 빠져 기아에 이를 때까지 계속 밟는 것. … 저들의 손에 앉은 굳은살과 딱지를 보라. 저 허파들을, 척추뼈들을 보라. 더러워지며 일당을 받는 몸들. 기호 작용의 환을 완벽히 아물리는 더러움과 보수.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가 문학이다. ”(‘코르푸스’)
그림=조미형 작가 그렇다. 자꾸만 잊게 되지만, 문학은 진실로 자본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자본은 우리의 온몸을 지배한 채 끊임없이 강탈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거부하는 게 문학의 일이다. 아무리 숙련된 독자라도 ‘간단후쿠’를 펼치기는 쉽지 않다. 아마 끝까지 읽어내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소설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모든 문장이 찌르듯 아프기 때문이다. 거대한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한 얼굴을 하고서 우리에게로 육박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김숨에게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듯하다. 아니, 염두에 둘 겨를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할머니들의, 저 옛날 소녀들의 몸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그 안에서 벌어지는 고통을 ‘남김없이’ 써내는 것만이 유일한 과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가이기에 그것이 한 옛날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이야기, 즉 문학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내 몸에서 없어도 되는 건 입.
내 몸에서 또 없어도 되는 건 눈에 달린 입.
내 몸에서 또 없어도 되는 건 귀에 달린 입.
내 몸에서 또 없어도 되는 건 코에 달린 입.
내 몸에서 또 없어도 되는 건 아래보다 아래에 있는 영혼에 달린 입.
…
내 몸에서 없어도 되는 입은 또 있다. 아기집 속에 있는 입이다.
아기집은 아래의 아래에 있다. (259~260쪽, 강조는 원문)
눈에도 귀에도 코에도 달린 입은 심지어 영혼과 아기집에도 달렸다. 소설은 일본군의 정액은 ‘군인 콧물’이라는 말로 은유한다. 삿쿠가 막지 못한 콧물은 결국 요코의 몸으로 흘러들었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말았다. 그 뒤로 요코의 온몸에 입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눈에도 입이 달려 “다른 여자애의 손에 들린 보리주먹밥”을 먹고, 귀에도 입이 달려 “할아버지가 이빨도 없는 입으로 까먹는 해바라기씨”를 까먹는다. 요코의 몸에서 자라나는 아기를 살려야 할까 죽여야 할까. 아기는 요코의 뱃속에서 요코의 몸을 먹으며 점점 커간다. 하지만 그 아기의 절반은 나의 몸을 겁탈한 군인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래도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면 어디에 다녀왔다고 해야 하나? …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기가 태어나면 어쩌지? 아기는 어쩌지? 누구 아기냐고 하면 뭐라고 하나? 군인 아기라고 해야 하나? 군인들 아기.”(147쪽)
인간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으로 개별자로서 자신의 한계인 ‘죽음’을 넘어선다. 하지만 소녀들의 몸속에 깃든 새 생명은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훼손되고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소녀들의 생이, 소녀들의 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군인들의 씨앗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은 어린 소녀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역설이다. 심지어 요코는 아기를 잉태한 채로 군인들을 받는다. 부른 배를 보고 한 군인은 “가와이소다”(263쪽)라고 말한다. ‘불쌍하네’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코는 이렇게 생각한다. “가와이소다는 나쁜 말이다. 그건 아리가토고자이마스보다 훨씬 나쁜 말이다. ”(263쪽) 역설로 가득한 소녀들의 삶은 동정조차도 불가능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 물건이 되고자 했던, 애써 정신을 지우고 몸을 지우고자 했던 소녀들에게 얄팍하게 ‘인간적인 것’을 불어넣는, 그리고 다시 파괴하는 저 싸구려 동정은 차라리 배를 짓밟는 군인들의 군홧발보다 더 악랄하다.
그러나 피해자와 가해자가 쉬이 둘로 나뉘지 않기에 이 폭력의 구조는 쉽사리 해소되거나 깨어질 수 없다. 차라리 할 수 있는 것은 더 높은 곳에 있는 악을 보는 것. 그것이 과거의 고통을 바라보는 소설이 비단 채록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문학적 글쓰기로서의 증언”(우미영)으로 거듭나는 길이기도 하다. 전쟁은 소녀들만 간단후쿠로 만들지 않는다. 군인도 ‘군복’으로 만든다.
군인의 얼굴이 천장을 향해 들린다. 나는 군인의 입속으로 새끼 쥐가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하다. 똑바로 가누지 못하는 몸을 그네처럼 앞뒤로 흔들던 군인이 괴성을 지르며 내 몸 위로 엎어진다. 격렬히 떨며 내 몸에 매달린다. 내 배에 대고 뜨거운 입김을 가쁘게 토한다.
“마마, 마마!”
“죽지 마!, 죽지 마!”
“마마, 마마!”
“죽으려면 네 엄마 몸 위에서 죽어!”
나는 군인이 죽을까 봐 무섭다. 아니다. 내 몸 위에서 죽을까 봐 무섭다. 아니, 아니다. 군인이 죽는다면 간단후쿠 위에서 죽는 것이다. 나는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됐으니까. 군인도 군복을 입고 군인이 된 걸까.
내가 군복을 입으면 나도 군인이 되는 걸까. 간단후쿠가 되는 것보다 군인이 되는 게 나으려나. 군인이 되면 밤마다 군인을 데리고 자지 않아도 되니까.
‘간단후쿠, 군복, 간단후쿠, 군복…….’ 나는 머릿속에서 해당화만큼이나 꽃잎이 많이 달린 꽃의 꽃잎을 하나씩 따며 간단후쿠와 군복을 번갈아 중얼거린다. (157~158쪽)
쓰인 적 없는 편지
나오미는 미치코 언니의 집에 편지를 썼다. 그녀가 돼서. ‘아버지, 어머니, 나는 만주에서 죽었어요.’ 주소는 몰라서 적지 않았다. (275쪽)
조금만 천천히 생각해 보면 “나는 죽었다”는 발화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죽은 이가 어떻게 말하는가. 죽음과 동시에 몸에 붙어 있는 혀는 기능을 멈춘다. 하지만 우리는 “나는 죽었다”고 글을 쓸 수는 있다. 대니얼 헬러 로즌은 여기서 생각을 뻗어 나가 그리하여 ‘나’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논증하기에 이른다. ‘말하는 나’와 ‘글 쓰는 나’는 다른 존재다. 살아 있는 나에게서는 이 둘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지만, 죽음 이후에 남는 건 결국 ‘글 쓰는 나’뿐이다. “어떤 경우든 ‘혀/어’는 화자와 화자의 몸 너머로 뻗어 나간다. 한때 자신을 낳았고 또 살게 해준 존재를 망각에 빠뜨림으로써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대니얼 헬러 로즌, ‘에코랄리아스’, 2005, 조효원 역) 이것이 김숨의 소설에서는 아주 슬픈 방식으로 변주된다. 나오미는 미치코가 되어 ‘나는 죽었다’고 글을 쓴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심장하지만, 편지에 주소가 적히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 심오하게 다가온다. 편지는 도대체 누구에게 갈 것인가. 누군가에게 과연 읽히기는 하는가. 누구에게도 가지 않고 누구도 읽지 않는 편지라면 왜 쓰여야 하는가. 요코 역시 강물에 대고 편지를 쓴다. 강물에 쓰는 편지는 누구도 읽을 수 없는 편지다. 아니, 더 정확히는 ‘쓰인 적 없는’ 편지다.
‘엄마, 나 만주 실 공장에서 아기를 낳을 것 같아요. 누구 아기인지는 묻지 마세요. 실 공장에서 번 돈은 집에 갈 때 가지고 갈게요. 답장은 마세요.’
너무 길다.
꼭 쓰고 싶은 말만 써야 한다면.
‘답장은 마세요.’(287~288쪽)
편지는 단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답장은 마세요.’ 어차피 읽힐 수도 없지만, 아무 내용도 없이 ‘답장은 마세요’라고 쓰인 편지를 받는다고 생각해 보라. 황당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누군가는 요코가 살아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코는 그저 자기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것 아닐까.
문학이 꼭 대단한 역사적 사명을 띠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늘 그 안에서 전위를 추구하고 있지 않아도 된다. 다만, 누군가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그 문학은 자기 나름의 독자와 위치를 찾아 나간다. 당장 대답이 없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 살아서 답을 듣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김숨의 말마따나 저 ‘뿌리 뽑힌 존재들’의 목소리가 작가에게로 깃든다. 작가는 그 목소리를 충분히 써내고 우리는 충분히 들으면 그것으로 된다. “신학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분리됨으로써 구원의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요구할 수 없게 된”(아도르노, ‘미학이론’, 1970, 홍승용 역) 예술. 그런데도 김숨은 집요하게 위안부 소설을 썼다. 김숨만 쓴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 소설을 쓴다고, 소설을 읽는다고 80년 전 만주의 위안소에서 참혹하게 훼손되는 소녀들을 그곳에서 구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통 앞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따지고 묻는 것은 김숨에게 큰 의미가 없다. 누구도 읽지 않았던, 읽지 못했던 편지를 붙잡아 두는 것. 그러니까, 소녀들의 몸으로 들어가서 그 편지를 다시 쓰는 일만이 작가의 과제다. 이 글이 쓰이고 있는 지금, 생존해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총 6명이다. 이제, 저 쓰인 적 없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더 늦기 전에.
◆심사평-김주연 “고통의 언어화 가능성에 질문… 근래 보기드문 수작” 올해에는 30편의 응모작 가운데 절반쯤 되는 작품들이 당선작에 육박하는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응모자들 가운데 한 분은 1946년생(이국헌), 다른 한 분은 1947년생(김기진)으로 80세에 가까운 고령자로서 평론 내용에 있어서도 만만찮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팽팽한 경쟁구조에서 이미 작고한 소설가 박상륭론을 두 분이, 중견 소설가 김숨론을 두 분이 선택했는데, 이 4편이 내용면에서도 서로 각축을 벌일 정도로 우수하였다.
박상륭 소설가는 난해한 작가세계로 인하여 그동안 비평적 접근이 어려웠는데 ‘쓸쓸한 행로의 윤리; 박상륭 소설에서 니체의 초인과 감내하는 인간’(신화정), ‘존재의 전회와 시원적 소리의 지평’(윤이담) 두 편의 평론은 이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었다.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 집중한 윤씨의 글은 그 자신 난해한 구문을 피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까웠으나 신씨의 글은 니체와의 대비를 통한 신성의 탐구가 흥미로웠다. 박상륭이 전개한 신의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는 일은 여전히 두꺼운 벽과 싸우는 일이라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두 분의 용기를 크게 상찬해 드리고 싶다.
당선작은 김숨 소설가의 최근작 ‘간단후쿠’를 밀도 있게 분석함으로써 고통과 언어의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추적한 오경진씨의 역작 ‘쓰이지 못한, 쓰인 적 없는’으로 돌아갔다. 비평의 모티프 발견과 문체에 있어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이 평문은 근래 보기 드문 수작으로서 일제 식민지 위안부에 가해진 고통을 위안부 및 전지적 시점을 오가면서 간명하게 서술한다. 글의 본질은 고통의 언어화 가능성, 즉 문학의 자리에 대한 가열한 질문이다. “고통 앞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따지고 묻는 것은 김숨에게 큰 의미가 없다. (…) 그러니까, 소녀들의 몸으로 들어가서 그 편지를 다시 쓰는 일만이 작가의 과제”라는 이 평론은 아마도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쓰인 글들 가운데 최초의 문제적 인식일 것이다.
또 다른 한 편의 김숨론(이레)도 잘 쓰인 글이었으나 앞의 작품에 불가피하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문학에서 음악의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간 ‘음악을 회복하는 일’(오웅진)도 충분히 흥미로운 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여 말해두고 싶다. 한 작가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이 문학평론 본연의 자리에 가깝다는 점을 환기하고자 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당선소감-오경진 “문학은 불안한 희망, 천천히 그리고 아프게 쓸 것” 적대와 사랑. 꽤 오래 나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다. 하나가 영원의 일이라면 다른 하나는 찰나의 일이다. 세상을 둘러보라. 무엇이 영원의 일인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문학은 이를 뒤집는다. 찰나에 속한 사랑을 마치 영원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기어이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게끔 한다. 문학은 불안한 희망이다. 덧없는 세계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이 ‘거짓말’을 나는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
잡념이 끓어오르면 노트북 앞에 앉았다. 빈 화면에 글자를 채우면, 그리하여 내 안의 언어를 다 토해내고 나면 조금 괜찮아졌다. 말이 떨어졌다 싶을 때 다시 책을 집었다. 책이 없으면 불안했다. 그래서 내 가방은 늘 무거웠다.
짧지 않은 시간, 문학과 멀어져 있었다. 간절히 원했던 문학과 다시 마주했을 때, 그 감정은 ‘즐거움’이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중독’이나 ‘도취’는 어떨까. 그나마 조금 가까운 것 같다.
나를 비평가로 키워낸 것의 팔할(八割)은 조효원 교수님이다. ‘정확히 길을 잃는’ 방법을 알려준 스승께 오늘의 기쁨을 돌린다. 지난 2년간 나의 글들을 예리한 눈으로 읽어준 김미경·홍지민 선배를 포함한 동료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 글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하늘에 계신 어머니와 아직 지상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나의 ‘즐거운 편지’(황동규)를 받아 마땅한 이에게.
“반복되는 전쟁과 폭력과 학살.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된 소녀들은 여전히 곳곳에 있다. 우리가 보고 있지 못하거나 보려고 하지 않을 뿐.”(김숨, ‘간단후쿠’ 작가의 말에서)
‘간단후쿠’가 돼야 했던 소녀들에게, ‘쓰인 적 없는’ 편지를 보내온 이들에게 뒤늦은 답장을 보낸다. 부질없는 이 기록을 어여삐 읽어주신 김주연 선생님과 세계일보사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얼마 전 거금을 들여 가볍고 부드러운 만년필을 하나 샀다. 그런데 오늘 손에 쥔 이 만년필이 왜인지 무겁고 뻑뻑하다. 느리게, 천천히 그리고 아프게 쓰겠다.
△1991년 인천 출생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신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