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예지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열흘 전 주말, 우리는 종합병원 후문의 별관에서 모였다. 막내이모의 장례식을 위해서였다. 거기서 이틀을 보낸 뒤 납골당으로 이동하여 마지막 수순을 밟았는데 그러는 동안 누구도 예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예지는 어디 있느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무슨 꺼림칙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아직 내과병동에 입원 중이라고 속삭였다. 같은 병원이었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돼 안정을 취해야 하니 막내이모의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는 거였다. 막내이모에게 간을 이식한 사람은 예지였다. 예지는 막내이모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나서 엄마는 내게 예지한테 가보라고 했다. 그나마 어릴 때 둘이 가장 친하지 않았냐고 갈 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다, 라는 말도 덧붙였다. 예지와 나는 여덟 살 차이였고 예지가 열 살이 되기 전까지 서로의 집을 오가며 몇 번 본 게 전부였다. 그 후로 십 년이었다. 마치 엊그제도 만난 사이처럼 문병을 다녀오라는 엄마의 지시는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엄마는 내가 소방공무원시험의 수험생이라는 점을 자주 잊었는데 어쩌다 내가 용돈 얘기를 꺼낼라치면 그 사실을 상기하고 화를 냈다. 그런 엄마가 내 손에 선뜻 지폐를 쥐여 주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예지에게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다 주라는 명목이긴 해도 액수가 제법 되었다.
알고 보니 그건 심부름 값이었다. 그러니까 엄마는―혹은 가족들은―일종의 메신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사람으로 엉뚱하게도 나를 내세운 셈이었다. 다음 날 오전 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갓 스무 살이 된 사촌동생에게 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어떤 식으로 전달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어떻게 전해도 그것은 그 말을 꺼낸 사람을 몰아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간을 줬는데도 죽었다고? 왜 죽어? 어떻게 죽어? 그런 말을 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나를 쏘아보는 낯선 소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막상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실내 공기가 뜻밖에도 산뜻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최적의 환경을 위해 공기청정기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덕이겠지만 어쨌든 거기에서는 무엇이건 함부로 손대고 더럽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내 기척에 여자애가 고개를 들었다. 링거를 꽂은 손으로 침대에 엎드린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참이었다.
오, 언니!
남자도 굼뜨게 상체를 일으키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한눈에도 몸집이 컸는데 오동통한 얼굴만 보면 남자인지 남자애인지 분간이 잘 안 가는 인상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만큼은 환자보다 더 환자 같았다. 나는 한 손에 든 음료박스를 어디 둘까 고민하는 척하며 남자애의 시선을 피했다. 남자애가 주시하던 쪽은 내가 아니었다.
그거 하나만 먹어도 돼요?
아, 두 개 먹어도 돼요.
나는 남자애가 앉은 간이침대 옆에 자리를 잡으며 선선히 대꾸했다. 남자애는 웃음기 없이 박스를 뜯고 알로에주스 병 하나를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예지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십여 년 만에 본 예지는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앳된 숙녀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도톰하게 솟은 콧대 끝이 동그란 모양이며 외까풀의 큼지막한 눈매가 막내이모와 닮았다. 벌써 알로에주스만 두 병째 해치우고 있는 남자애를 의식하며 나는 예지에게도 음료를 권했다. 앞머리를 고정시키는 헤어롤을 매만지던 예지가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이런 건 무리인가.
지금은 안 당겨서. 나중에 먹을게, 언니.
예지가 애교 섞인 음성으로 대꾸했다. 장내 가스가 배출된 엊그제부터 뭐든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입맛이 딱히 없다고 했다. 다이어트도 하고 좋지 뭐. 비쩍 마른 몸을 훑으며 네가 뺄 데가 어디 있냐고 말하려는데 옆에서 남자애가 그러다가 나처럼 된다, 라고 경고하듯 말했다. 그 말에 예지가 새치름히 눈을 흘겼다. 그러자 남자애가 알았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였고 예지도 곧 토라진 표정을 풀며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는데 그들의 대화 중 어느 대목에서 웃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애가 평균치 이상의 튼실한 체형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농담이었다.
예지와 나는 간략하게나마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예지는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에 가지 않았으며 근래에는 동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고 했다. 학생 때부터 계속해온 야간타임을 풀타임으로 전환하여 급여도 제법 쏠쏠하던 참이었는데 이번 수술이 잡히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며, 아쉽다는 듯 코끝을 찡그리던 예지가 이내 생글거렸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던 예지보다 지금의 예지가 훨씬 더 잘 웃는 것 같았다. 환자복과 링거를 제외한다면 당장이라도 이곳저곳을 활보할 법한 생동감마저 느껴졌다. 나는 예지가 자기 친아버지의 여동생, 그러니까 예지의 고모 집에서 줄곧 생활해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거주지나 가족관계 같은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또 염려되기도 했다. 그걸 얘기하기 시작하면 대화 내용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였다. 더군다나 제삼자인 누군가의 곁에서 나눌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병실은 이인실이었고 창가 옆 침대는 비어 있었다. 예지가 입실하기 전부터 누워 있던 환자는 예지가 마취에서 깨어나고 끙끙 앓은 지 사흘째쯤 되었을 때 그곳을 떠났다고 했다. 머리칼이 없는 할머니였는데 이따금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셔서 손수건으로 환자의 얼굴을 닦거나 성경을 읽거나 목에 연결된 관으로 영양제를 주입하곤 했다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예지는 그들이 다른 병원으로 이송된 것 같다면서 그 할머니 생각만 하면 마음이 이상하다고 했다. 앞으로도 남은 생을 그렇게 살아야 할 텐데, 어떠한 맛도 느끼지 못하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섭취해야 한다는 게 끔찍하면서도 불쌍하다고. 그러자 벽에 기대어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던 남자애가 예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정말 불쌍한 건 아주머니지, 라고 반박했다. 요란한 게임 소리와 함께 팔을 움찔거릴 때마다 남자애가 입은 카키색 항공점퍼의 매끄러운 재질에서 광택이 났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이 쏠려 있었는지 예지가 불쑥 내게 이런 말을 속삭였다. 언니 우리 민식이 잘생겼지?
민식과 예지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사귄 사이라고 했다. 같은 반 동급생이었지만 민식이 한 살 더 많았다. 한 학년을 꿇은 탓이었다. 예지가 내게 그런 식으로 자기소개를 대신하는데도 민식은 게임에 빠져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 예지가 곧 입대할 날이 머지않았다며 저 머리칼이 생명인데 우리 민식이 조만간 찌질해지겠네, 라고 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별안간 예지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더니 정수리에 쪽, 입을 맞추고는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능청스러운 민식의 돌발 행위와 그에 익숙하다는 듯 킥킥거리는 예지의 반응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민식의 체구였다. 일어서니 생각보다 더 컸다. 희멀겋고 둥근 얼굴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야구선수 못지않은 덩치였다. 반면 예지는 아기 새처럼 작고 가냘프기만 해 둘은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그들 사이를 잇는 끈끈한 무언가가 존재하는 듯했는데, 한없이 곰살궂게 민식을 대하는 예지의 태도랄지 그런 예지에게 은근히 기대기를 주저 않는 민식의 넉살 같은 게 그랬다. 그건 내가 추측해온 예지의 이미지와 어긋나는 것이었고, 밀려드는 당혹감에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일주일 전, 그러니까 모든 절차가 갈무리되고 납골당 인근의 식당에 둘러앉았을 때 가족들은 비로소 예지의 이름을 꺼냈다. 막내이모부는 수술이 끝나는 대로 예지에게 자취방을 구해 주기로 했는데 막상 장례를 치르고 나니 남는 돈이 없다고 했다. 막내이모부는 예지의 친아버지가 아니었고 예지는 부모가 이혼한 당시인 열 살 이후로 친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는 재작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엄마와 외삼촌은 예지가 지금 스무 살이 아니냐며 자기 아빠 사망보험금도 진즉에 수령하지 않았냐고 서로에게 확인하듯 되물었다. 큰이모는 예지가 겉보기엔 철부지 같아도 영악한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자기 엄마의 목숨을 담보로 방을 구해 달라는 자식이 어디 있냐고 발칙하다고도 덧붙였다.
끝내 자취방 문제에 대한 답은 미뤄 둔 채 가족들은 비슷하게 정리된 얼굴을 하고 헤어졌다. 해당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얘기할 건 얘기해야 했고 본의 아니게 그 숙제를 떠맡게 된 나로서는 병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당하다는 마음이었다. 예지의 눈을 마주칠 때마다 까닭 없이 면구해져서 괜스레 어린 시절의 시시콜콜한 일화나 주워섬기며 시간을 끌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예지는 병원 밥은 맛이 없고 먹으면 체할 것 같다면서 식판을 민식에게 넘겼다. 민식은 거의 오 분 만에 그것을 해치우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그 틈에 무언가를 말해 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머뭇대는 사이에 민식이 성큼성큼 돌아와버려서였다.
일단은 끼니부터 때우고 보자 싶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처에서 죽 가게를 본 것 같았다. 예지에게 참치야채죽을 사다 주기로 하고 돌아서는데 민식이 급히 내 팔목을 붙잡았다. 기왕이면 자기 것은 낙지김치죽으로 부탁드린다는 것이었다.
병원 맞은편의 죽 가게에서 내 몫의 단팥죽을 포함한 참치야채죽과 낙지김치죽을 사 들고 나왔다. 다시 병원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어디선가 찐 옥수수 냄새가 났다. 버스 정류장 인근의 노점이었다. 정류장 뒤편으로는 화단이 있고 화단 사이로 난 샛길은 공원으로 통해 있었다. 공원 너머를 가늠하려고 머리를 젖히던 나는 주변의 기척에 돌아섰다. 보행 신호로 바뀌어 있었지만 길을 건널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보였다. 큰 몸을 구부정히 움츠리며 링거병을 매단 휠체어를 밀고 있는 민식과 이마에 분홍색 헤어롤을 달고 담요를 두른 채 거기 앉아 있는 예지가.
그들은 이쪽으로 오는 내내 대화를 나누었고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는데도 모르는 체하는 것 같았다. 느릿느릿 다가온 민식이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고 내게 물어 왔다. 그건 내가 꺼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에게는 반대편에 그대로 서 있기만 하던 내가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인사라도 하지 그랬어. 나는 어차피 건너올 텐데 무슨 인사냐고 말하는 대신 너희는 왜 밖으로 나온 것이냐고 물었다. 민식이 오늘 같은 날씨에는 무조건 나와 줘야 한다며 호기롭게 앞장섰다. 내게서 죽 봉지를 건네받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우리는 화단 샛길을 걸어 공원으로 넘어왔다. 공원 부지는 널찍한 편이었다. 자전거 길과 산책로가 사방으로 단정하게 뻗쳐 있고 적당한 간격으로 늘어선 나무들이 가지마다 봉오리를 맺었다. 나는 새삼 낯설었다. 한 달 전만 해도 곳곳에서 눈발이 날리고 돌풍이 불어왔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만물에 봄기운이 깃드는 것도, 그걸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만끽하는 사람들도.
공원을 산책하는 이들은 주로 예지와 같은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었다. 간혹 다른 문구가 새겨진 환자복도 보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휠체어 신세였다. 그들은 몹시 천천히 움직였다. 휠체어를 미는 아주머니가 휴대폰을 보거나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걷는 일이 잦아서였다. 환자들은 대체로 유모차에 탄 아기처럼 얌전한 자세였으나 안색은 약간 불안해 보였다. 어쩌면 원래 그런 표정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산책로 가장자리의 벤치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앉고 보니 자리가 애매했다. 예지와 마주 앉으려니 휠체어가 산책로를 가로막는 형국이 되었다. 민식이 일어나 벤치 끄트머리로 예지의 휠체어를 위치시키는데 그사이 어떤 아주머니가 휠체어를 끌고 와 내 옆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조금씩 붙어 앉으면 한 사람이 앉을 공간은 나왔지만 민식은 선 채로 죽 봉지를 열었다. 낙지김치죽과 참치야채죽 용기를 꺼내 들고는 예지와 함께 삼 미터쯤 떨어진 벤치로 가서 앉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래 거기가 좋겠다. 어줍게 흘러나온 나의 말에 예지만 살짝 돌아보며 웃어주었다.
민식과 예지가 나누는 이야기는 이쪽에서 들릴 듯 말 듯 했다. 들려도 끼어드는 게 우스울 만큼 어중간한 거리여서 나는 묵묵히 죽만 떠먹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간격을 두고 나와 한 벤치를 나눠 앉은 아주머니는 휴대폰으로 드라마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극은 절정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세상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년,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카랑카랑한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행인들은 듣고도 못 들은 체하는 기색이었다. 민식과 예지도 이마를 맞댄 채 휴대폰 화면에만 빠져 있었다.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었고 나만 그렇지 못한 듯했다. 그곳에서 주변을 살피며 입을 우물거리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
단팥죽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달짝지근해야 입맛이 도는데 먹을수록 밍밍해 혀끝에 겉돌았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맛있는 건 언제 먹어도 맛있다. 그런 맛은 두고두고 기억되기 마련이었다. 언젠가 막내이모네서 먹었던 호박죽도 그랬다. 예지는 세 살, 나는 열한 살이었다. 어린 예지는 채 열기가 식지 않은 새알심을 멋모르고 건드렸다가 손끝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 그때 놀란 사람은 예지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막내이모에게 혼날까 두려운 나머지 부러 큰소리로 울어댔다. 열한 살치고 도를 넘긴 엄살이었지만 막내이모는 너그러운 말씨로 나를 달랬다. 괜찮아, 괜찮아. 예지가 울지 않아서였을까. 막내이모는 예지의 손을 살피지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매사에 침착한 편이었고 예지가 방 안을 어지럽히거나 떼를 써도 화내지 않았다. 예지를 자주 안아 주지도 않았다. 막내이모는 대개 요리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책장을 들추거나 하면서 부엌 식탁에만 머물렀다. 식탁에 깔린 유리는 사선으로 금이 가 두꺼운 테이프로 이어붙인 상태였는데 나중에는 가지처럼 뻗은 균열이 더해져 보기가 더 흉측해졌다. 그 집에는 그런 식으로 때워 놓은 물건이 많았다. 움푹 꺼진 목재 표면을 포장지로 가린 방문, 닫혀 있을 땐 모르지만 열어 보면 뚜껑이 분리되는 밥통, 임시방편으로 연결해 두어 자칫 방심하고 기댔다간 뒤로 넘어가기 십상이던 의자 등받이…… 나는 예지의 친아버지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림=조미형 작가 방학기간 내가 그곳에 갈 즈음이면 그는 늘 집을 비웠다. 막내이모와 한바탕하고 나서였다. 수년 뒤 그들은 이혼했고 재혼한 막내이모는 자기 이름을 딴 죽 가게를 열었다. 그거 팥죽인가요?
옆자리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드라마가 끝났는지 잠잠해진 휴대폰을 벤치 위에 놓아둔 상태였다. 팥죽을 향한 아주머니의 집요한 시선에 혼자 먹기가 멋쩍어진 나는 드셔보실래요, 하며 여분의 숟가락과 새 용기를 건넸다. 워낙에 양이 많기로 유명한 가게라 플라스틱 용기 두 개로 소분해 둔 터였다. 아주머니는 사양 않고 내가 건넨 죽을 받아들었다.
담백하니 좋다. 우리 아가도 죽이라면 환장을 했는데.
아주머니가 왼편의 휠체어를 향해 두어 번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아가라는 말에 흘끗 넘겨다 보니 거기에는 아가라고 불리기엔 너무 커 버린 성인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내 또래, 아니 나보다도 연상일 듯했다. 비니를 쓴 여자의 동공은 허공을 향해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말을 걸 때마다 미세하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소리는 전혀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자기 딸이 하루에 한 번은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아주 효녀가 따로 없다고 했다.
평소에는 자주 못 나오시죠.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꼭 그들의 일상에 관하여 잘 아는 사람마냥. 아주머니는 대수롭잖게 웃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래도 내가 우리 아가 덕에 먹고살잖아요.
아주머니의 ‘아가’는 과연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이십여 년 전에 현장에서 일하다가 크게 다쳤는데 산재보험이 적용되어 매달 국가로부터 적지 않은 보상금을 받아 왔다고 했다. 간병인 고용 명목으로 지급되는 돈이지만 아주머니는 병원에 머물며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아 냉장고도 바꾸고 중고차도 사고 융자금을 얹어 작은 아파트에도 투자했다. 장기 간병인을 두면 시간 여유도 생기고 전반적인 관리가 용이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돈을 벌 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무엇보다 자신이 오래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후 준비를 든든히 해 둬야죠. 뭐 실제 집은 저기나 다름없지만.
아주머니가 턱짓하는 곳을 눈으로 따라가니 베이지색 건물이 보였다. 공원 너머에 위치한 또 다른 병원이었다. 아주머니의 딸과 같은 처지에 놓인 환자들이 상주하다시피 입원해 있는 산재전문병원이라고 했다. 그제야 공원 산책자들의 환자복 디자인이 약간씩 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분들도 그렇겠구나. 저기가 집이겠구나. 말하자면 아주머니는 딸의 간병을 자처한 대신 의무 수행에 따른 금전적 대가를 손에 넣는 쪽을 택한 셈이었는데 글쎄, 나로서는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어차피 병원에 묶인 몸이라면서 남아도는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또 그런 식으로 버는 돈이 뭐가 그리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아주머니가 환자의 엄마가 아닌 오로지 맡은 임무에만 충실한 직업인처럼 보였다.
아이고. 한입만 먹으려다 쓱쓱 다 먹어버렸네. 이걸 어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덕분에 즐거운 산책 되었어요. 내가 애를 데리고 너무 오래 나와 있었네.
그래봐야 이십여 분 정도였으나 아주머니는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휠체어에 탄 여자의 비니를 바로잡아 주고 담요가 흘러내리지 않게 좌석 가장자리 틈으로 꼼꼼히 밀어 넣는 손길이 능숙했다. 내가 벤치 위의 휴대폰을 건네주자 아주머니가 고맙다는 표시로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들더니 오늘은 이걸 듣자, 라고 혼잣말을 했다. 혼잣말처럼 보였지만 딸에게 말한 것이었다. 곧이어 휴대폰에서 유재하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아주머니가 볼륨을 높이자 비니 아래 여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분명 그랬다. 아주머니가 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손인사도 아닌 고개인사도 아닌 어정쩡한 동작으로 그녀에게 응했다.
그렇게 오후의 빛을 반사하며 멀어지는 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먹먹함이 몰려왔다. 한순간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인 기분이었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여하튼 여자에게는 아주머니가 없으면 안 되는 거였다. 엄마와 딸, 딸과 엄마…… 엄마는 큰이모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다고 말했었다. 다 죽어가는 부모한테 사지 멀쩡한 자식이 그 정도는 해야지, 조건을 따지는 건 도리가 아니지. 자취방에 대한 약속을 받고 수술을 결심했다는 예지의 태도가 정확히 어땠는진 모르지만 예기치 못한 부고에 가족들은 허탈하고도 분한 마음을 고스란히 그 애한테로 돌리고 있었다. 그건 억지였다. 어쨌건 하나뿐인 자식이 아니었더라면 수술조차 시도하지 못했을 테니까.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예지를 적극 옹호하지는 못했는데, 단지 가족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실상 그럴 주제가 못 되었다. 어쩌면 가족들보다도 예지라는 아이에 대하여 심고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떤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 자체가 경솔한 일 같았다.
*
물론 모두가 처음부터 예지를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친아버지 손에 붙들려 엄마와 헤어져야 했던 예지를 가엾게 여기고 외동딸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는 막내이모를 매정하다며 타박했다. 가족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제각기 예지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면서부터였다. 자기 엄마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예지는 큰이모에게, 외삼촌에게, 그리고 우리 엄마에게 순차적으로 연락해 왔다. 목적은 돈이었다. 나날이 늘어나는 액수에 아무래도 전 이모부가 시킨 것 같다며 외삼촌이 예지의 친아버지에게 직접 연락을 시도했다. 나는 그 통화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가 있었는데 명절이나 제사 모임 때마다 어김없이 그것이 재생되던 탓이었다. 예지의 친아버지가 잔뜩 꼬부라진 혀로 그런 적이 없다며 내뱉었다는 욕과 폭언을 외삼촌이 특유의 억양까지 흉내 내며 재연하는 바람에 다소 심각한 내용임에도 가족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 뒤로 가족들은 마음 놓고 예지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예지 아버지에 관한 말도 어느 시점부터는 꺼내지 않았다. 나이는 많지만 푸근한 인상과 경제력을 겸비한 남자와 재혼해 한창 가게를 꾸려가던 막내이모가 돌연 간경화 말기 진단을 받게 되었을 무렵, 또다시 전 이모부의 이야기를 들춰내기 시작했다. 지난날 그의 폭력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막내이모가 꾸준히 망가져 왔다는 것이다. 이어 가족들은 답장을 하건 말건 생뚱한 이모티콘을 넣어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오는 예지의 한결같은 철없음에도 염오를 넘어선 증오를 표했다. 나쁜 것만 빼닮았다고 입을 모아 힐난했다.
그 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나 또한 가족들 앞에서는 예지의 이름조차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무심결에 예지는 요새 어떻게 지내는 거냐고 물으면 모두가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봤다. 숟가락을 들던 큰이모는 도로 그것을 내려놓고 외삼촌은 갑자기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그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았다. 이십대 중반에 들어서며 나는 나대로 심란해져 친척들과 만나기를 기피했으니까.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속수무책 시간만 흘려보내던 내게 소방공무원을 제안한 건 엄마였다. 지인의 자녀가 시험을 봤는데 금세 붙었다고 했다. 어딘지 내 전공과도 맞닿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 나는 그길로 강의를 신청하고 수험서를 구매했다. 그렇게 삼 년을 공부했고 이쯤 되니 나는 내가 왜 소방공무원이 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봉사나 헌신, 희생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지 회의가 들었고 그저 문제지가 요구하는 답을 맞히는 데만 골몰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도 예지는 내가 멋지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런 것을 하려고 생각했어? 사람 구하는 일이잖아.
그 애는 벌써 내가 합격한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그래 봐야 소방공무원도 월급쟁이에 불과하다는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그보단 어서 침대로 가 눕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예지가 습관처럼 가지런한 앞머리를 손끝으로 흩뜨렸다. 이마에 돌돌 말려 있던 헤어롤은 제거된 상태였는데 짧은 머리칼이 기존 형태대로 예쁜 굴곡을 유지하고 있었다. 밖에서 막 돌아와서인지 병실 내부가 첫인상보다 어둑해진 느낌이었다. 휠체어에 탄 예지가 두 팔을 벌리자 민식이 링거 바늘이 빠지지 않도록 유의하며 예지의 전신을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유리라도 다루듯 신중하고 절제된 동작이었으나 그럼에도 짧은 순간 홀쭉한 예지의 배를 칭칭 감싼 붕대가 드러났다. 그조차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민식은 차분하고 잽싼 손길로 환자복 상의를 내려 환부를 가렸다. 그 위에 담요를 덮어준 다음 휠체어를 착착 접어 병실 한편에 세워둔 다음에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런데 너희는 아까 뭘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야?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내 진로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민식이 말없이 유튜브를 틀어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구십 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가수의 영상이었다. 대략 삼십 년쯤 된 가수였는데 최근에 추억의 가수를 소환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완전 잘생겼지? 옛날 사람인데 패션도 힙하고. 이제 본격적인 활동도 시작할 건가 봐.
예지가 말했다. 나는 의아했다. 지금 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어서였다.
어차피 다들 과거 영상에만 열광하는 거잖아. 지금은 나이가 오십이라며.
어느새 박스 속에서 토마토주스 병을 꺼내 마시던 민식이 내 말에 차근차근 응수했다.
그 사람, 예전에 활동할 때는 사람들 편견에 정당한 대우도 못 받고 미국으로 쫓겨나다시피 떠나야 했대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인정받고 보상받는 기회를 얻는 거죠.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야, 결국은 이참에 돈 벌려고 들어온다는 거네.
일순 고요해졌다. 누구도 나의 말에 웃거나 응수하지 않았다. 똑같이 무감하고 서먹한 눈길만을 내게로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한 공간에 있어도 한 공간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나와 그들의 거리가 단박에 수십 미터로 벌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기분이 불편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익숙했다. 그저 오래도록 벌어져 왔던 그 간격을 확실히 목도하고 실감했을 따름이랄까. 뒤늦게 민식이 입을 열었다.
그게 나빠요?
아니 뭐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적당한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입안이 바싹 마르며 갈증이 났다. 나는 몸을 일으켜 냉장고 안을 뒤적이다 여기 사과가 있네, 하며 과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예지가 침대 옆 두 번째 서랍에 있다고 알려주었고 나는 과도를 꺼내 사과 깎기에만 몰두했다. 그사이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예지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링거액을 갈아 끼웠다. 회복이 빠른 편이라 이삼일 내로 퇴원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예지는 어쩐 일인지 퇴원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민식아, 나 너희 집에서 하룻밤만 재워주면 안 돼? 민식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 허락하진 않으실 걸, 이라고 말하는 걸로 봐서 부모랑 같이 사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십대를 막 졸업한 이십대에 불과했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아직은 독립된 공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오전에 병원 갈 채비를 하던 내게 엄마는 예지를 만나면 너무 잘해주지 말라는 아리송한 말을 덧붙였었다. 오후가 되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
하지만 나는 내심 궁금했다. 가족들의 말마따나 전 이모부의 사망보험금이 예지 앞으로 지급되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예지가 자기 친고모의 집에만 머무르는가. 아무리 어려도 그만한 계산은 할 줄 알 텐데. 큰이모의 표현대로 ‘영악하고 발칙하다’면 더더욱 그래야 앞뒤가 맞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멍하니 텔레비전만 올려다봤다. 민식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시청하던 프로그램이 끝나자 비로소 그가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예의 그 박력 있는 동작으로 예지의 정수리에 입을 쪽 맞추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못 볼 사이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볼을 맞비벼댔다. 나는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며 민식에게 한 손을 흔들어 보였고 그는 고개를 까닥 숙이고 돌아섰다.
그림=조미형 작가 민식이 없는 병실은 눈에 띄게 휑했다. 그래서인지 예지의 안색도 오전보다는 한층 더 침울해진 것 같았다. 언니도 바쁘면 가 보라고 자기는 진짜로 괜찮다고, 애써 활달한 톤을 유지하며 예지가 말했다. 그래 놓고 퇴원하면 어디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민식이 군대 가면 면회는 언제 갈 수 있느냐고 요즘엔 군인이 기다리는 거 더 싫어한다던데 민식이까지 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하느냐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내게로 화살을 돌려 언니는 정말 연애할 생각이 없냐며 결혼은 하긴 할 거냐며 두서없는 질문을 던져 왔다. 나는 비혼주의자라고 둘러대며 딴생각을 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말문을 여는 방식에 대해서였다. 예지야, 놀라지 말고 들어 봐…… 조그맣게 새어 나온 말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예지가 대뜸 환자복 상의 주머니와 침구 속을 더듬었다. 어, 이게 어디 갔지. 헤어롤이 안 보인다고 했다. 밖에 있을 때 주머니에 넣어 놔서 그대로 있는 줄 알았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거였다. 그게 없으면 완벽한 스타일링이 불가능하다면서 예지는 진심으로 난감해했다. 내가 나가서 새것을 하나 사다 주겠노라고 해도 고개를 내저었다. 돌기가 촘촘한 전문가용이라 같은 것을 구하기 쉽지 않다며. 그럼 나중에 재구매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당장 필요하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그것이 신체의 일부처럼 되어 버려 수중에 없으면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기어이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초저녁의 어스름이 생경하게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휠체어에 예지를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내가 낑낑거리며 뼈만 남은 그 애의 몸을 들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자 예지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제 발로 일어나 휠체어 기둥에 링거병을 꽂고 옮겨 탔다. 뭐야, 설 수 있었어? 예지는 민식의 품에 안기는 게 좋아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 물론 민식도 그걸 알고 있다고.
우리는 공원 쪽으로 이동했고 밤 산책을 나온 환자들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잰걸음으로 걷던 아주머니 몇이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향해 쾌활하게 알은체를 했다. 혹시 낮에 만난 아주머니도 보일까 싶었지만 어둠 속에서는 그 아주머니가 그 아주머니 같았다. 휴대폰 플래시로 사방을 비추던 예지가 불쑥 민식의 이야기를 꺼냈다. 민식도 한때 환자였다고 했다. 그땐 예지만큼이나 말라서 큰 키로 휘청거리는 희멀건 수수깡 같았다고. 그를 짝사랑했던 예지는 민식이 완치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일 년 뒤 학교로 돌아온 민식이 예지에게 정식으로 고백했다고 했다. 치료의 후유증이라면 민식의 식사량이 대폭 늘었다는 점이었는데 예지는 민식의 잘 먹는 모습이 마냥 좋았다. 그가 무사히 회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동아들인 민식을 아끼는 부모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예지는 알았다. 예지는 그들과 만난 저녁을 잊지 못한다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어. 주말 부부였던 그들은 까닭 모를 우울증과 거식증에 허덕이던 아들을 위해 살림을 합쳤다고 했다. 호텔 요리사이던 아버지가 장기간 근무한 직장을 그만두기로 한 결심이 컸다. 그는 아들에게 어떻게든 음식을 먹이기 위해 조금이라도 입에 맞는 레시피를 찾아내려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동안에 민식의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민식이 손재주가 좋았다는 걸 기억해 내고 꾸준히 부어온 적금을 털어 민식을 위한 작은 목공방을 차려 주었다. 민식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민식이는 정말 잘해. 나중에 나한테 집도 지어준댔어.
둘이 살 집?
당연하지. 널찍하게 지을 거니까 언니도 놀러 와. 여기에는 내 방이 없어서.
방이 없어?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예지가 말을 이었다.
두 개뿐이거든. 고모랑 고모부랑 하나 쓰고 오빠랑 남동생이랑 하나 쓰고……
담담하기 그지없는 어조였고 표정에도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예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단순히 방 개수나 가족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얄팍하고 직설적인 내 질문에 비한다면 예지의 답변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나는 물었다. 전 이모부가 돌아가셨을 때 너의 이름으로 보험금이 나왔다는 게 사실이냐고. 그렇다면 왜 분가하지 않는 거냐고. 뜻밖의 질문일 텐데도 예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쪽으로 가서 쉬자며 벤치 옆을 가리키는 모양새가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풀어놓을 태세였다. 나는 또 괜한 이야기를 들쑤셨나 싶으면서도 예지로부터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어쩌면 남모르게 돈을 감춰 두고 어디엔가 쓸 궁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만 귀띔해 주려는지 모른다. 아니면 설마 일찌감치 다 써 버렸다고 토로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갓 스무 살짜리가 억 단위의 거금을 쉽게 탕진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예지라면 혹시, 하는 것이었다.
줬어.
예지는 그렇게만 말했다. 줬어? 누구한테? 내가 되묻자 예지는 지체 없이 고모한테, 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걸 다? 예지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예상 밖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돈을 함부로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할 수가 있나. 도대체 어째서 모조리 줘 버린 것이냐고 따지듯 캐묻는 내게 예지는 발끝을 흙바닥에 비비며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렇잖아, 언니. 갚을 거는 갚아야 하는 거잖아.
예지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실로 그것만큼 명료한 표현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대답의 의미를 반복해서 되짚어야 했다. 그러니까 예지는 단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보험금으로 빚을 갚듯 고모에게 무언가를 갚아 버린 셈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리석고 모순된 행동이었다. 차라리 그 돈을 가지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편이 서로에게 좋았을지 모른다. 비록 그 돈으로 채무를 갚은 고모네의 살림이 한결 나아지고 가족들이 예지를 대하는 태도가 유해졌을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으니까.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날짜까지 예지는 여전히 그 집―집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곳―에서 하릴없이 맴돌며 살아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림=조미형 작가 불현듯 주머니 속 지폐가 떠올랐다. 예지에게 필요한 걸 사다 주라며 엄마가 준 돈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나는 손끝으로 지폐의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예지가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방이었고 이걸로는 도저히 그것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이동했다. 낮에 앉았던 벤치를 찾으려 했지만 그 벤치가 그 벤치 같았다. 헤어롤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한낮보다는 기온이 많이 내려 춥지 않냐고 물었더니 예지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 플래시는 그대로 켜 둔 채 액정 화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신체의 일부처럼 여기는 물건이라고 강조하더니만 막상 못 찾으니 쉽게 단념한 것도 같았다. 실은 그것을 핑계 삼아 밖으로 나오려 한 게 아닐까 싶었다. 밖에서는 꼭 말해야지, 했던 나도 그새 용건은 까맣게 잊고 애먼 궁금증만 해소하고 서 있듯이. 그랬다. 따지고 보면 참 이상하고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예지 쪽에서 자기 엄마의 행방을 전혀 묻지 않는다는 점이 이상하지만 수술 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도 이상한 거였다. 휴대폰을 보고 있던 예지가 나를 불렀다. 언니. 그러면서 오른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오늘밤에 보름달이 뜬대. 대박이지? 나는 초승달 하나 걸려 있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직은 좀 더 어두워져야 할 걸, 했고 예지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도로 액정에 시선을 떨구었다. 나는 그런 예지를 보았다. 마침내 예지한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었는데 예지는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왼쪽부터)김화영, 권지예. ◆심사평-김화영·권지예 “흠잡을 데 없는 문장 끝의 반전… 주인공 통해 역설적 희망 그려”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 여러 편이 외국이 배경이거나 외국인이 주인공인 소설이어서 내용 면에서 글로벌하고 다양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배경이나 등장인물의 다채로움이 흥미를 끌더라도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역량이 부족했다. ‘수몰’은 브로콜리, 특히 로마네스코 브로콜리의 프랙털 구조나 너무도 작은 꽃송이(플로렛)를 관찰하는 모임에 빠진 남편의 이야기다. 공들인 문장과 소재의 독특함이 매우 흥미로웠다. 마치 눈으로 직접 브로콜리의 구조를 해부하는 듯한 정치한 묘사가 부부관계가 없는 부부의 관계에 대한 환멸과 의혹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심리묘사도 뛰어났다. 그러나 20층 아파트에 갑자기 집안으로 홍수가 범람한 듯 거대한 탁류가 쳐들어오고, 여자가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급류를 문을 더 활짝 열어젖히며 맞이하는 판타지로 처리한 결말은 아쉬웠다. ‘예지’는 아버지도 죽고 재혼한 엄마에게 간 이식을 해주었으나 엄마마저 금방 죽은 줄 모르는 예지에게 이종사촌 언니인 나는 가족의 메신저로 부고를 알리러 간다. 이모들과 외삼촌은 예지가 이미 친아버지의 억대의 보험금을 수령했고 자기를 버린 엄마의 간 이식을 담보로 자취방을 구해 달라는 영악하고 발칙한 자식으로 여기고 외면해왔다. 그러나 냉정하고 중립적인 화자인 나는 입원실에서 예지와 남자친구 민식을 만나 두 사람의 의외로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며 내심 이상하게 여긴다. 흠잡을 데 없는 문장과 화자의 연민과 비판적 시선으로 노련하게 서술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반전을 발견하게 된다. 천박하게 돈밖에 관심 없는 친척들의 허를 찌르는 갓 스무 살 된 예지의 어리석은 듯 쿨한 결정과 삶의 태도는 오히려 건강하고 윤리적이며 계산적이지 않다. 젊고 생동감 있는 여주인공을 통해 오히려 역설적인 희망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당선되지 못한 응모자에게는 격려와 정진을,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드린다.
◆당선소감-고아림 “나를 ‘우리’로 확장시키는 소설의 힘 믿어” 아마 열 살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곱슬곱슬한 앞머리를 한 미경이가 방학 숙제라며 제출한 시를 보며 당시의 저는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거듭해서 읽어 내려가다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도 내 마음을 꺼내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언제나 말하고 돌아서면 아까 왜 그랬지, 하며 후회하는 일이 다반사인 제게 ‘기꺼이 수정할 여지를 주는’ 글이라는 것은 꽤나 너그러운 소통 수단이었습니다. 나를 알아주라고 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남게 되고 그렇게 그들을 더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다시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과정. 저에게 소설은 내가 단지 나로만 남지 않고 ‘우리’로 확장되게 하는 힘을 지닌 가장 믿음직한 쓰기의 양식이었습니다.
번번이 길을 헤매는 저에게 방향 자체보다는 방향을 찾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해 주신 편혜영 선생님. 선생님의 단단하고 소중한 가르침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입니다. 더불어 따뜻한 말씀과 격려의 손을 내밀어 주셨던 신수정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다정하고도 든든했던 일분 식구들을 떠올리면 그때 그 장소로 돌아간 듯 마음 한편이 포근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또 저의 첫 문우였던 쓰담 식구들. 그분들과 함께 제가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처음부터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하성란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첫 단추만 어긋나도 전전긍긍하는 저라는 사람을 믿고 지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더하여 제가 무엇을 하든 한결같이 저와 한마음이 되어주는 남편, 서광민. 날것을 마주하는 첫 독자로서 고충이 많을 텐데 매번 선선히 감당해 주어서 참 고맙습니다. 또 우리 가족들, 부족한 제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 너무도 힘이 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의 윤우. 우리의 서윤우.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게. 건강하자.
마지막으로 ‘예지’를 지지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1984년 서울 출생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