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달력의 첫 장이 넘어가면 서울 종로구 혜화로 골목에도 어김없이 한 살의 나이가 더해진다.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문구점으로 통하는 ‘아림사문구’도 예외는 아니다. 1983년부터 동네 ‘문방구 아저씨’로 살아오며 어느덧 고희(古稀)를 넘긴 손화준 대표에게 새해는 설렘보다 묵직한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북적이던 공간은 이제 적자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지만,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문을 연다. 서울에서 오래된 문구점 중 하나였던 ‘보성문구사’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곳은 동네 문방구의 마지막 숨결이자 혜화로의 세월을 품은 기억 저장소다.
서울 종로구 혜화로의 ‘아림사문구’ 앞을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지나가고 있다. ◆흘러간 시간만큼… ‘운명’이 된 문구점 최근 문을 열고 들어선 이곳에서 기자는 시간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축구공과 농구공, 옅은 먼지를 이불처럼 덮은 각양각색의 장난감, 벽면을 채운 배드민턴 채는 보는 이를 단숨에 1980~1990년대로 데려다 놓는다. 수학 시간의 필수품이었던 각도기와 진열대에 꽂힌 형형색색의 펜, 정밀한 선을 긋던 미술용 4B 연필도 정겨운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손 대표는 1983년 처음 문구업에 발을 들였다. 아이들을 좋아해 시작했지만 사실 초반에는 적성에 맞지 않아 고생도 꽤 했다. 두어 달 만에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도리어 인수자가 ‘못하겠다’며 손을 드는 바람에 다시 문구점을 맡게 됐고, 그것이 지금에 이르는 운명의 길이 됐다고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자리는 2018년 보성문구사로부터 물려받은 터전이다. 가게 운영이 힘들어진 보성문구사 주인은 ‘간판은 바뀌어도 이곳이 계속 문구점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남겼고, 인근에서 문구점을 하던 손 대표가 그 청을 받아들여 자리를 옮겨왔다. 인수 직후 그는 보성문구사에 남아 있던 교련복 등 각종 물품 880여점을 서울생활사박물관에 기증하며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자부심만으로 버티기에 현실은 냉혹하다. ‘콩나물시루’처럼 아이들이 가득했던 혜화초등학교 신입생은 이제 수십 명에 불과하다. 학교가 준비물을 직접 마련해주는 제도가 정착되면서 아이들이 문방구 문턱을 넘을 이유도 사실상 사라졌다. 여기에 대형 생활용품점과 온라인 쇼핑몰의 ‘빠른 배송’ 공세까지 더해지며 골목 문구점의 생존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서울 종로구 혜화로에서 ‘아림사문구’를 운영하는 손화준 대표가 매대를 정리하고 있다. ◆줄어드는 꼬마 손님… 그래도 매대에 실제로 기자가 머문 시간 동안에도 문 앞에 놓인 뽑기 기계를 하러 동전을 바꿔 간 아이들 몇 명만이 가게를 들렀을 뿐이다. 인터뷰 중간 ‘귤 말랑이’를 사겠다며 들어온 초등학생 손님이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소소한 간식거리였다. 문득 기자가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 몰래 사 먹던 ‘불량식품’의 기억이 스쳤다.
크리스마스나 과학의 날이면 트리와 글라이더를 매대 가득 쌓아놓고 팔아도 금세 동나던 풍경은 이제 전설이 됐다. 팔리지 않은 재고는 도매가보다 낮은 가격에 넘기거나 기부 처리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트랙을 달리던 미니카나 하이틴 스타의 얼굴이 박힌 다이어리 속지들도 추억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나마 최근에는 뜻밖의 손님들이 가게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카드를 구하려는 인근 대학생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인터뷰 당일 오전에도 카드 수십 개를 떼어왔다는 손 대표는 ‘아직 동심을 간직하신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에게 동심은 빠르게 변하는 완구 시장의 흐름을 쫓으며 아이들의 마음에 보조를 맞추려 애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2026년 새해가 밝아도 손 대표는 어김없이 매대 앞에 선다. 삐뚤게 놓인 박스테이프의 줄을 맞추고, 색색의 볼펜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나하나 제자리에 꽂아 넣는 그의 손길은 정교하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낡은 문방구일 뿐이겠지만, 손 대표에게 이곳은 평생의 운명이자 아이들과 나누는 따뜻한 대화의 장이다.
그가 정성껏 갈무리한 매대 위에는 혜화로의 기억이 한층 한층 새겨질 것이다. 이따금 가게 앞을 지나는 시민들이 던지는 ‘이 동네는 그래도 문방구가 아직 하나 있네’라는 한마디, 손 대표는 그 다정한 안부 하나로 오늘도 동심의 명맥을 지키고 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