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가까이 베네수엘라 사회를 관통해 온 통치방식인 ‘차비스모(차베스주의)’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최정예 군사력을 동원해 확보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신병은 좌파 정치노선 차비스모의 존속 가능성을 흔들고 있다.
베네수엘라 좌파 집권사로도 치환할 수 있는 차비스모는 반미·반신자유주의 노선과 강한 국가 개입, 빈곤층 동원을 핵심 축으로 삼는다. 좌파 성향 군인 출신이자 베네수엘라 정계 거물인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이름에서 나왔다.
혼돈의 베네수엘라 미국의 군사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체포돼 미국으로 압송된 3일(현지시간) 마두로 정부 지지자들이 수도 카라카스 거리에서 성조기를 불태우며 항의하고 있다. 카라카스=AP연합뉴스 차베스 전 대통령은 1999년 취임 후 적극적으로 반미 행보를 펼쳤다. 외국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석유 산업을 비롯해 전력·통신 등 주요 인프라를 국유화하고 국가 주도의 재분배 정책으로 빈곤층 지원과 사회복지 확대를 추진했다. 차비스모는 한때 중남미 좌파 정권 연대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2004∼2008년 국제유가가 한때 배럴당 100달러로 급등하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호황기를 맞았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2009년 베네수엘라 경제 보고서를 보면 2006년 국내총생산(GDP) 상승률은 10.3%까지 찍었다. 차베스 정부는 이 시기 ‘남아도는 돈’을 산업에 일부 재투자하면서도 막대한 비중을 사회복지 분배 예산에 배정하면서 빈곤율을 62.1%(2003년)에서 31.9%(2011년)까지 떨어뜨리기도 했다. 중남미 주변국과 국제사회는 20세기 중후반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 이름을 올렸던 베네수엘라의 과거 명성을 상기하며 앞다퉈 재평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차베스 전 대통령 사망 이후 공식 후계자로서 ‘차비스모’를 이어왔다. 2013년 차베스 전 대통령 사망 직후 치러진 대선에서 마두로 대통령은 근소한 표 차이로 승리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3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해 국외로 이송했다고 발표한 뒤 칠레 산티아고에서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고마워 칠레, 우리 곧 떠날게"라고 쓴 종이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러나 마두로 대통령 집권 이후 베네수엘라는 초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 치안 불안에 시달리며 경제가 붕괴 수준으로 추락했다. 극심한 생활고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지만 마두로 정권을 강경 진압에 의존하며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민심 이반과 이민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유엔난민기구와 국제이주기구 등의 조사 결과를 보면 전 세계 베네수엘라 출신 난민과 이주민의 수는 2020년 기준 340만명에 달한다. 차비스모의 역내 영향력도 빠르게 약화하는 추세다. 마두로 대통령이 갖고 있는 ‘무능한 포퓰리즘 독재자’라는 이미지는 물론 미국의 제재 강화와 국제사회의 압박 속에서 진영을 막론하고 베네수엘라 모델과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마두로 대통령의 미국 압송은 개인의 위기를 넘어 베네수엘라 체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미군의 공습 과정에서 파괴된 베네수엘라군 대공전차. 카라카스=로이터연합뉴스 다만 일각에서는 차비스모의 즉각적인 붕괴를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은 새 정부로의 안정적인 정권 이양 때까지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통치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한동한 혼란스러운 정세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당장 차비스모에서 보다 민주적인 형태로의 체제 전환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뤄질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베네수엘라 정권은 마두로 대통령과 군부를 양대 축으로 하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에 의해 체포돼 있지만 군과 관료 조직, 일부 지지층을 중심으로 한 권력 기반이 여전히 남아 있다. 또 베네수엘라 국민 사이에서도 반미 정서를 매개로 한 정치적 서사가 오랜 기간 이어져 왔던 만큼 반감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차비스모가 사라지기보다는 재구성의 단계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윤선영 기자 sunnyday70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