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탑 건설이 수반되는 반도체 산업단지를 전력이 생산되는 (남쪽) 지방에 조성해야 한다. ”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전’ 목소리에 수도권 반도체 업계와 지방자치단체들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미 부지와 전력 확보 계획을 마련하고 보상절차에 돌입한 해당 기관들의 표정에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지난 10일 이재명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K-반도체 비전·육성전략 보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발단은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0일 주재한 ‘K-반도체 육성전략 보고회’였습니다. 이 대통령은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길을 돌려달라”고 발언했습니다. 이어 “외부에서 생산된 전력을 공급받는 송전망 건설도 엄청난 문제이고 근처에 발전소를 짓는다 해도 액화천연가스(LNG), 열병합발전소 수준인데 그걸로 할 수 있을지”라며 의문을 나타냈습니다. 아이디어 제시 차원이었습니다.
◆ SK 클러스터 지난 2월 착공…삼성 국가산단 내년 하반기 착공
전북도의회 균형발전특별위원회는 이튿날인 11일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LNG 발전소 건설 계획 재검토 및 국가산단 새만금 분산 배치 촉구’ 성명서를 내며 불씨를 키웠습니다.
경기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의 LNG 발전소 계획을 당장 재검토하고 전력과 인력 공급이 쉬운 새만금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분산 배치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광활한 새만금 부지 활용과 국가 균형발전, 지방에너지 종속 해소 등을 내세우며 용인과 새만금의 동시 개발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용인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 조감도. 용인시 제공 정읍·남원·진안·임실의 4개 시·군의회와 시민·농민단체들도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어 초고압 송전선로 계획 백지화와 용인 국가산단 재검토 등을 촉구했습니다. 논란에 기름을 부은 건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었습니다. 김 장관은 “용인 반도체 산단의 이전을 고민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김 장관은 26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에 입주하면 두 기업이 쓸 전기의 총량이 원전 15기 분량이어서 꼭 거기에 있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라며 “에너지가 생산되는 곳에 기업이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부 지역 정치인과 시민단체의 정치적 구호를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전북에 지역구를 둔 여당 국회의원들은 “환영한다”며 지원사격에 나섰고, 용인지역 국민의힘 당협위원장들은 “포퓰리즘적 발상”이라며 반발했습니다. 지역 갈등 양상으로 전환된 겁니다. 해당 기업들도 그동안 투입한 매몰 비용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이 예정된 용인시 남사읍 일대. 용인시 제공 만약 현실화한다면 대상은 삼성전자가 투자하는 국가산단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용인지역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규모 반도체 산단과 클러스터를 각각 조성 중입니다.
이동·남사읍 일원에 조성될 777만3656㎡ (약 235만평) 규모의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에는 삼성전자가 36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생산공장(Fab·팹) 6기를 세웁니다. 원삼면 일원 415만6135㎡(약 126만평)에는 SK하이닉스가 122조원을 투입해 4기의 팹을 건설하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향후 건설 과정에서 투자 규모는 더 불어날 전망입니다.
그런데 SK하이닉스는 올해 2월 이미 착공해 1기 팹의 뼈대가 올라갔습니다. 되돌리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안호영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가운데)이 지난 18일 반도체 클러스터 2단계 사업의 새만금 유치를 촉구하고 있다. 안호영 의원실 제공 ◆ 돌이킬 수 없게?…LH·삼성전자, 반도체 국가산단 조성 ‘속도전’ 이처럼 정치권을 중심으로 경기지역 반도체 클러스터·국가산단에 대한 이전·분산배치 목소리가 고조되는 가운데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조성에는 속도가 붙었습니다.
29일 용인시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지난 19일 산단 조성을 위한 부지 매입 계약을 마쳤습니다. 이에 LH는 22일부터 산단 예정지 토지 소유주들과 토지와 건물·공작물·수목 등 지장물에 대한 보상 협의에 들어가 닷새 만에 진행률 14.4%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LH는 진행 중인 1차 토지 보상을 비롯해 관련 보상을 순차적으로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조만간 산단 조성 공사를 발주하고, 내년 하반기 착공에 들어갑니다.
용인 국가산단은 2023년 3월 조성 계획이 발표된 뒤 행정절차가 이행돼 지난해 12월 국토교통부로부터 사업계획 최종 승인을 받았습니다. LH는 올해 6월 보상계획을 공고하고, 감정평가와 보상액 산정 등 손실보상 절차를 진행해 왔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감도. 용인시 제공 이곳에는 80여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설계 기업과 연구기관도 입주합니다. 시 관계자는 “용인 국가산단은 기존 기흥·화성·평택 사업장 및 협력업체들과 접근성이 뛰어나고, 수도권 우수 인력 확보에도 유리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용인지역 반도체 생산시설 건설을 위한 전력·수도 공급안 역시 어느 정도 국가 계획에 반영된 상태입니다.
이상일 용인시장은 전날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나 용인에서 진행 중인 초대형 반도체 프로젝트와 교통 인프라 구축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정부가 지원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장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용인에 투자하는 해당 반도체 기업과 지자체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지원이 수반돼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용인시 반도체 고속도로 위치도. 용인시 제공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 기류’에 휩쓸린 듯 보이는 용인 반도체 산단 이전론을 두고 반도체 업계에선 탄식이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반도체 생산설비를 수도권에 짓는 건 단순히 전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도 들립니다. 기존 반도체 생태계와 수자원, 인력수급 문제 등이 거론됩니다. 반도체 업계는 국가산단 조성을 ‘시간과의 싸움’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폭증하는 반도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선 산단 내 생산 라인의 적기 가동이 필수라는 설명입니다. 계획 발표 이후 28개월 만에 완공된 일본 구마모토현의 대만 TSMC 파운드리 공장과 비교하면 용인 반도체 생산시설 공정은 매우 느린 편입니다.
결국 선택은 다시 위정자(爲政者)의 몫이 됐습니다. ‘정치 논리’에 앞서 ‘경제 논리’를 두고 충분한 토론이 이어지길 고대합니다. 어떤 선택이든 미래 대한민국의 산업 경쟁력을 고려한 신중한 결정이어야 합니다.
용인=오상도 기자 sdoh@segye.com